[국회 정상화/한나라 등원결정]한나라 왜 전략바꿨나?

  • 입력 1998년 10월 9일 19시 35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총재가 9일 전격적으로 국회 등원을 선언했다. 투쟁의 장을 국회로 옮겨 더욱 강력하고 효과적인 투쟁을 벌여 나가겠다는 게 이총재의 다짐이었다.

그러나 한달 이상 정기국회를 공전시키면서 장외투쟁을 주도했던 이총재가 여야 대치상황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도 등원투쟁으로 급선회한 데는 말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첫째는 여론의 부담이었다. 추석을 계기로 한나라당의 등원을 촉구하는 여론이 확산된데다 당내에서조차 ‘무조건 등원’과 ‘원내외 병행투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더욱이 마땅한 장외투쟁방법이 없었다는 점도 이총재에게는 고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외투쟁을 계속할 경우 민심이반이 심해지고 당내 결속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해 전격 등원을 결정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이총재는 등원 결정에 앞서 당내 의견수렴 등 사전정지작업을 벌였다. 7일 당중진들이 참여한 비상대책회의에서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하면 조건없이 등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데 이어 8일에는 의원총회에서 등원시기 결정권을 위임받은 뒤 20일째 단식중인 이기택(李基澤)전부총재를 문병해 단식을 중단시켰다.

이날 저녁 중진의원 16명이 모여 이총재의 결정에 힘을 실어주기로 의견을 모으자 이총재는 이날 밤 윤여준(尹汝雋)정치특보를 가회동 자택으로 불러 기자회견문 작성을 지시했다.

한편 대부분의 의원들은 등원결정을 반겼으나 기자회견에서 등원을 선언한 데 대해서는 불만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 의원은 “의원들이 장외투쟁을 하면서 함께 고생했는데도 이총재가 마치 혼자의 결단으로 등원하는 것처럼 발표한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또 여권의 정국운영 구상과 사정(司正)방향 등에 대한 정보부재와 전략전술상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이에 대해 신경식(辛卿植)사무총장은 “등원결정에 앞서 당내 의견을 충분히 수렴했다”면서 “조건없는 등원을 선언한 것은 국민과 나라를 먼저 생각한 이총재의 고독한 결단”이라고 설명했다.

〈김차수기자〉kimc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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