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을노씨 “잊혀진 이름, 6·25참전 경찰… 그들의 희생마저 묻혀서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7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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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경찰유공자회 김을노씨
국군-미군과 연합해 치열한 전투… 6만명 참전… 1만7000명 전사
생존자 年300명씩 세상 떠나는데… 증언록 ‘구국경찰사’ 1권 내고 중단

경남 산청경찰서 순경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김을노 씨가 자신의 전쟁 증언이 실린 ‘구국경찰사’를 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경남 산청경찰서 순경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김을노 씨가 자신의 전쟁 증언이 실린 ‘구국경찰사’를 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고지에 참호를 파고 북한군을 기다렸다. 남은 총이 없어 옆의 동료가 건네주는 수류탄만 연신 언덕 아래로 던졌다. 9시간의 전투를 마치고 날이 밝아온 다음에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봤다. 숨진 아군 20여 명과 언덕을 덮은 인민군 시신 200여 구가 눈에 들어왔다. 땀과 흙이 범벅이 된 6개월 차 초임 순경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기쁨보다 또 한 고비 넘겼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

서울 마포구 6·25참전경찰국가유공자회에서 만난 김을노 씨(88)는 6·25전쟁 당시 경남 산청경찰서 순경이었다. 그는 1950년 8월 31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산청경찰서 소속 경찰 80여 명과 미군 30명이 연합해 경남 함안군 송도나루 인근에서 북한군에 맞서 싸웠다. 남강전투였다. 그는 바지를 걷어 전투에서 입은 왼쪽 다리의 화상 상처를 보여줬다. “북한군 병사가 수류탄을 던졌는데 기름통이 터졌어. 바지에 불이 붙었을 땐 정말 죽는 줄 알았다니까.”

김을노 씨가 전공을 세워 받은 표창장.
김을노 씨가 전공을 세워 받은 표창장.
1953년 7월 27일. 휴전 후 63년이 흘렀지만 최전선에서 싸운 경찰들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지지도 기록되지도 않았다. 전쟁 발발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김 씨도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 돼서야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올 1월 경찰청이 참전 경찰 10명의 증언을 담은 ‘구국경찰사’를 발간하면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었다. 참전 경찰들의 증언 기록을 담당했던 경찰사편찬팀은 1월 말 구국경찰사 1권 발행을 마치고 해체됐다. 인원을 보강해 작업을 이어가겠다던 경찰은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김 씨는 6·25전쟁 당시 경찰은 중요한 전력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크고 작은 전투마다 국군이나 미군 등과 연합해 공적을 세웠고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했다. 김 씨도 휴전 직전까지 지리산 자락에 숨은 북한군을 상대해야 했다. 그 와중에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참전한 경찰관 6만3427명 중 1만7000여 명이 희생됐다. 그가 생존 참전 경찰들의 기억을 기록해 사료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김 씨는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참전 경찰 생존자들을 보며 걱정이 태산이다. 6·25참전경찰국가유공자회에 등록된 인원은 1997년 설립 당시 7800명에서 올해 3월 31일 기준 5327명이 됐다. 매년 300여 명의 참전 경찰들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살아남은 참전 경찰의 평균 연령도 86세로 높다. 김 씨와 함께 구국경찰사 편찬에 참여했던 강찬기 씨는 올해 초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강 씨의 기억은 세상에 전해질 수 없었다.

김 씨는 지금이라도 자신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면서도 아쉬운 듯 말했다. “지난해 12월 전쟁 당시를 증언해 줘 고맙다며 20만 원을 받았어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이제야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의미 있는 사료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김동혁 기자 hack@donga.com
#참전경찰유공자회#김을노#6·25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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