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의 르네상스 꿈꾸시더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문화예술평론가 박용구 선생 빈소… “예술인 도와주신 분” 조문 줄이어

“펜과 노트를 가져오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마지막 글을 쓰셨어요.”

국내 최초의 음악 평론집인 ‘음악과 평론’(1948년)을 냈던 원로 문화예술평론가 박용구 선생(사진)이 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102세.

고인의 딸인 화경 씨는 고인의 임종 직전 따로 남긴 말은 없었지만, 매일 일기를 쓰던 노트에 글을 적었다고 했다. 한자와 일본어가 섞인 글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고인의 한 지인은 ‘자연’에 대한 글일 것이라고 전했다.

7일 고인의 빈소에는 많은 예술인이 다녀갔다. 김인희 서울발레시어터 단장은 “항상 예술을 사랑하셨던 분이다. 평론가란 위치를 넘어 순수하게 예술인들을 도와주고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1914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일본 니혼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했다. 1937년 일본 음악평론사 기자로 활동하면서 본격적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1940년 귀국해 신문 기고 활동 등을 했으며 광복 직후 국내 최초의 음악 교과서인 ‘임시중등 음악교본’을 펴내는 등 국내 근대 음악의 기초를 닦았다. 고인은 5·16군사정변 이후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구금돼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의 예술혼을 꺾을 수는 없었다. 연극, 오페라, 시극 등의 연출뿐만 아니라 음악 서적 출판에도 몰두했다.

1967년 예그린악단 단장으로 취임한 고인은 국내 최초의 창작 뮤지컬로 평가받는 ‘살짜기 옵서예’(1966년)를 무대에 올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폐막식 시나리오를 집필하고, 창작 발레 ‘심청’의 무용 대본을 남기는 등 문화예술 전반에서 활동했다. 200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무용 및 음악평론을 발표하는 등 식지 않는 창작열을 보였다.

고인의 구술을 책으로 엮은 ‘박용구―한반도 르네상스의 기획자’(2011년)에서 고인은 한국 문화의 부흥을 희망했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한반도 르네상스를 성취하고, 성숙기를 맞아야 제구실을 한다고 보거든. 지금은 경제하고 문화하고가 이렇게 차이가 있다고. 그러니까 이렇게 경제처럼 문화도 세계에서 넘버원 넘버투가 헤아릴 정도로 올라가야 된다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새로운, 21세기다운 양식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심포카’라는 이름을 붙여 봤다고.”

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유니세프 문화예술인클럽 회장, 세계무용연맹 한국본부 회장 등을 지냈으며 은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딸 화경, 아들 동철 씨가 있다. 발인은 8일 오전 9시 30분. 장지는 경기 양주시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문화예술평론가#박용구#별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