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즈베크 한인 죄수 ‘7번동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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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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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옥살이 황원선씨 절망에서 새 삶 찾기까지

주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의 우병일 영사(왼쪽)와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베카바트 지역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황원선 씨(가운데). 황 씨가 우 영사 등의 탄원 덕분에 4년 만에 석방된 올 1월 24일 교도소 앞에서 찍었다. 다른 옷이 없었던 황 씨는 죄수복을 입고 출소했다. 오른쪽은 통역을 맡았던 현지인. 황원선 씨 제공
주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의 우병일 영사(왼쪽)와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베카바트 지역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황원선 씨(가운데). 황 씨가 우 영사 등의 탄원 덕분에 4년 만에 석방된 올 1월 24일 교도소 앞에서 찍었다. 다른 옷이 없었던 황 씨는 죄수복을 입고 출소했다. 오른쪽은 통역을 맡았던 현지인. 황원선 씨 제공
살구나무가 보였다. 연한 붉은색 꽃의 나무. 얼마 전 누군가가 여기에 목을 맸다.

‘자다가 고통 없이 죽을 수 없을까.’

2011년 4월 우즈베키스탄 베카바트 지역 교도소의 유일한 한국인 수감자 황원선 씨(47)는 침대에 누워 되뇌었다.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에서 남쪽으로 210km, 겨울엔 영하 40도인 이곳에 들어온 지 2년. 아직 7년이 더 남았다. 그는 다시 살구나무를 쳐다봤다.

그가 우즈베키스탄 검찰에 구속된 것은 2009년 1월. 그는 현지에서 무역업을 했다. 현지인 직원이 그의 이름을 내세워 우즈베키스탄인의 한국행을 불법 알선하다가 돈을 챙겨 달아났다. 졸지에 공범이 됐다. 그의 억울함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9년형이 선고됐다.

철창에 둘러싸인 한 평(3.3m²)도 안 되는 공간에 죄수 14명을 가둔 교도소 이송 열차. 13시간을 달렸다. 그는 7번 동에 배정됐다. 작고 더러운 침대가 그를 반겼다. 끝 모를 두려움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국에 홀어머니가 있었지만 차마 알리지 못했다.

2009년 7월의 어느 날. 교도관이 면회 요청이 왔다고 알려왔다. ‘누굴까….’ 구속됐을 때 많은 도움을 줬던 주우즈베키스탄 한국대사관의 이희석 영사(경찰청 소속)였다.

“아이고, 영사님….”

“힘내셔야 합니다.”

이 영사가 쌀밥과 불고기를 가져왔다. 하얀 쌀밥 위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두 달 뒤 이 영사의 후임인 심기철 영사가 찾아와 항소를 권했다. ‘나를 기억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타슈켄트에서 항소심이 진행된 6개월간 심 영사가 매주 그를 찾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를 절망시켰다. 2010년 3월 교도소로 다시 호송됐다. 절망이 깊어졌다. 2011년 4월경 죽음을 생각했다. 살구나무가 자꾸 눈에 보였다.

그의 죽음을 가로막은 건 심 영사의 계속된 면회였다.

“이럴 때일수록 희망을 잃으면 안 됩니다!”

2012년 여름부턴 후임인 우병일 영사가 왔다. 우 영사가 면회를 왔던 많은 날들 중 같은 해 11월 26일은 잊을 수 없다. 3시간여 면회가 끝난 뒤 우 영사가 그를 꼭 안았다.

“당신에게는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제가 있습니다.”

두 남자의 뜨거운 포옹은 3분 넘게 계속됐다. 그 옆을 지나던 수백 명의 수감자가 술렁거렸다.

“황 씨, 한국 정부가 왜 이렇게 당신에게 잘해줘?”

“세상에 어느 나라 대사관 직원이 죄수를 껴안아 주나?”

싸늘하게 식어 있던 그의 가슴이 뭉클거렸다.

“그건 교도소 안의 코리안 드림이었습니다. 다른 외국인 수감자들의 대사관 면회는 거의 없었거든요. 영사들이 와도 무심하게 ‘더이상 도와줄 수 없다’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대사관은 날 품에 안아줬습니다. 내 부모님이었습니다.”

올해 1월 24일 그는 마침내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4년 만이었다. 그동안 우 영사가 석방탄원서를 우즈베키스탄 당국에 수차례 제출하고 당국에 부탁한 끝에 지난해 12월 특별사면 대상이 된 것이다.

교도소 문을 나설 때 그는 여전히 죄수복 차림이었다. 다른 옷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 영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현재 부산에서 낮엔 냉면식당, 밤엔 야간업소 주방에서 일한다. 우 영사가 준 고동색 코르덴바지를 여전히 입고 있다.

“그들이 있어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기자 분에게 전한 말은 내가 받은 사랑의 30%도 담지 못합니다.” 15일 기자와 통화하는 그의 목소리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우 영사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그렇게까지 도운 이유를 물었다.

“일을 떠나 인간 대 인간으로 진심으로 대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황원선#우즈베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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