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Harmony]제주 ‘다희연’ 박영순 회장, 잘나가던 사업 내려놓고 녹차로 두 번째 인생을 시작하다

  • Array
  • 입력 2012년 10월 15일 03시 00분


코멘트

이 사람이 사는 법

탁 트인 녹차밭에서 잡초를 뽑다 불쑥 나타난 강단있어 보이는 ‘아줌마’. 이 사람이 바로 저 유명한 제주의 ‘다희연’ 박영순 회장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힘으로 녹차밭을 일구고 있다. 제주〓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탁 트인 녹차밭에서 잡초를 뽑다 불쑥 나타난 강단있어 보이는 ‘아줌마’. 이 사람이 바로 저 유명한 제주의 ‘다희연’ 박영순 회장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의 힘으로 녹차밭을 일구고 있다. 제주〓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윗밤오름과 알밤오름 사이에 펼쳐진 10만 9000여㎡(약 3만 3000평)의 녹차밭. 가을을 만나 한층 짙어진 녹차의 초록색과 더 선명해진 하늘의 색은 넓게 맞닿아 자연이 낼 수 있는 최상의 색 대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의 녹차나무는 화학비료, 농약, 제초제 무엇 하나 쓰지 않아 6년을 자랐음에도 어른 무릎 높이밖에 되지 않는다. 그 한가운데 선 누군가는 이곳을 차마 녹차밭이라 확신하지 못해 이렇게 묻고는 한다. “녹차밭이 어디예요?”

그러면 가을 공기를 마시며 잡초를 열심히 뽑던 ‘아줌마’ 한 명이 불쑥 나타난다. “여기예요. 녹차밭. 나무가 좀 작죠. 보기에는 이래도 유기농이라서 몸에 정말 좋아요.” 녹차의 성분에 대한 전문적인 설명도 잊지 않는다.

이 범상치 않은 ‘아줌마’는 1990년대에 온누리약국체인을 설립해 20년 만에 소속 약국만 1500여 개가 넘는 국내 최대의 약국 체인으로 키운 생약학 박사 박영순 ‘다희연’ 회장(66)이다. 2010년 온누리약국체인 회장직에서 퇴임한 그는 그보다 앞선 2004년부터 녹차와의 ‘외도’를 시작했다. 2005년 녹차밭을 일구기 시작해 2009년 첫 상품을 내놨다. 지난해에는 녹차밭은 물론이고 차문화관, 녹차 카페 등이 모두 들어찬 녹차종합테마파크 ‘다희연’을 열었다.

그는 왜 연고도 없는 제주에서 약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녹차와 함께 제 2의 인생을 보내고 있을까.

○ 백년해로의 공간

사방에 펼쳐진 녹차밭 한 가운데 있는 야트막한 동산 하나. 그 위에는 제주의 전통 초가집을 본 떠 만든 박 회장의 단층 주택이 있다. 집에서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누군가의 무덤이 보이고 커다란 추모비도 눈에 들어온다. 2004년 8월 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박 회장의 남편 고 주영돈 씨의 묘다.

부산대 약대를 졸업하고 약국을 운영하던 박 회장은 1978년 건강을 걱정하며 약국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약초(생약)의 성분에 관한 정확한 조언을 해주고 싶어 원광대 생약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그때 녹차에 푹 빠져버렸다. “녹차 잎 성분의 20% 이상은 우리 몸의 활성산소를 줄여줘 노화를 방지하는 최고의 성분, 카테킨이에요. 이렇게 한 가지 좋은 성분이 많이 들어있는 약초는 녹차가 유일해요. 녹차는 독성을 줄이기 위해 다른 약과 섞을 필요조차 없는, 최상의 약초이기도 하죠.”

그는 녹차로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마치고 약사들에게 약국 경영과 생약에 대한 강의를 한 것을 계기로 약국 체인을 이끌게 되면서 녹차를 잠깐 잊고 살았다.

녹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2004년 그에게 다시 찾아왔다. 부부는 6년여간 2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펜팔을 한 끝에 1969년 결혼했다. 결혼 전날 두 사람은 다음날 결혼식을 올릴 울산의 한 예식장 인근 다방에 앉아 백지를 펴놓고 4시간에 걸쳐 부부가 되는 그들의 다짐을 써내려갔다. ‘고천(告天)’, 하늘에 고하는 글이었다.

‘… 불변의 빛깔로 해로하리니 창천을 밝히는 해님을 비롯하여 생명 있는 모든 것이 증인되리라.’ 그들은 30여 년을 함께 살며 고천을 매일 함께 읽었고 더 굳게 해로를 약속했다.

“남편이 돌아가고 그 유골함을 선산에 묻고는 옆에 초가를 지어 여생을 보내려고 했어요. 우리 부부는 늘 죽을 때까지 열심히 일하자고 약속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선산에서 유골함만 지키고 있으면 남편과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더군요.”

그때 잊고 지냈던 녹차가 생각났다. 녹차 재배의 최적지인 제주에서 녹차밭을 일구고 거기에 남편의 묘소를 만들고 또 그 옆에 집을 짓고 산다면, 죽은 남편과 산 아내는 어쩌면 해로의 약속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2005년 땅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밀림’을 1년 가까이 개간했다. 농약에 한 번도 노출되지 않았던, 자연 그대로의 땅이 필요해서였다. 모두가 불가능이라 했지만 밀림은 1년이 지나자 숨겨놓았던 예쁜 땅을 드러냈다.

세상의 어떤 나쁜 물질 한 번 닿지 않았을 듯한 드넓은 수풀을 밀어내 동산이 드러나자 남편의 유골을 안장했다. 그 옆에 남편에게 책을 읽어줄 수 있고 매일 차와 커피를 가져다 놓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 3無… 자신과의 약속


그는 다희연에서 한 가지 약속을 더 지키고 있다. 남편에게 부끄럽지 않게,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게 가장 정직한 녹차를 만들겠다는 약속이다. 그 약속은 ‘화학비료, 농약, 제초제’ 없는, 3무(無) 경영 철학으로 구체화됐다.

“내가 약초의 성분 하나하나가 우리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공부한 생약학 박사잖아요. 사람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약사고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인체에 분명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성분이 든 농약이나 제초제를 뿌리겠어요.”

그는 인근 생선 가공 공장에서 가져온 생선찌꺼기를 발효시킨 다음 물과 함께 섞어 비료로 뿌린다. 농약을 뿌리지 않아 벌레가 늘 녹차잎을 노리지만 누군가 걱정할 때면 “유기농으로 재배된 녹차 잎은 잎 조직이 치밀해 벌레가 많이 먹기도 힘들다”고 웃으며 말한다.

제초제 한 번 뿌리지 않았고, 그 이전에도 농약이 전혀 닿지 않아 태초의 땅에 가까웠던 녹차밭에서 잡초들은 제 생명력을 모두 보여주겠다는 듯 자라고 또 자란다. 제초작업을 하지 않는 가을에는 어느새 멀대처럼 키가 커버린 잡초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 녹차나무를 내려다본다. 여기에 하얗고 끈끈한 줄을 녹차 잎마다 쳐놓는 이름모를 벌레의 장난까지 더해지면 녹차밭은 세상에서 가장 볼품없는 녹차밭이 되고 만다. 그러나 언덕 위 남편의 묘소에서 가을 하늘 아래 드넓게 펼쳐진 ‘지저분한’ 녹차밭을 바라볼 때면 박 회장은 그저 자랑스럽다.

“다희연은 제가 세상과, 사람과 했던 약속을 가장 잘 지키는 곳이에요. 벌레가 잎을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요. 그 벌레를 잡겠다고 농약을 치면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농약을 먹게 되겠어요. 그래도 젓가락만 했던 녹차나무가 6년 만에 이렇게 무릎까지 자랐네요. 지저분하고 벌레 천지이고 온 천지 잡초인 이 녹차밭이 너무 좋습니다.”
▼ 젊게 사는 그녀의 녹차 건강법 “하루 5잔 녹차 마시면 스트레스 사라지죠” ▼

박 회장은 매주 화, 수요일 울산과 부산에서 약사들을 대상으로 약국 경영에 관한 강의를 한다.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니 보통 오후 8, 9시에 시작해 자정 무렵 끝난다. 인근 숙소에 들어가면 오전 2시가 넘어야 잠이 들지만 3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공항으로 가 다시 다희연이 있는 제주로 향한다. 11일 만난 그는 “살면서 하루 3, 4시간 넘게 자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하면서도 얼굴 가득 특유의 건강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건강 비결로 단연 녹차를 들었다. 박 회장은 하루에 5, 6잔씩 꼭 녹차를 마신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뇌에서 베타파가 많이 나와 불안감이나 신경통이 생깁니다. 녹차는 뇌에서 알파파가 많이 나오게 해 사람이 편안한 상태가 되게 만들어요. 수행하는 사람들이 녹차를 많이 마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다만 그는 거창한 다구로 다도를 일일이 지켜가며 차를 마시는 일에는 반대한다. 복잡한 다구를 모두 챙기고 몸에 맞지 않는 어려운 다도를 억지로 지키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희연 안에 생활다례교실을 열고 스트레스 받지 않으면서 쉽게 녹차 마시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밥그릇에 마시더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편안하게 차를 즐기려 하는 것, 직책은 회장이지만 매일 잡초를 뽑고 녹차밭에서 일하면서 억지로 쉬려하지 않는 것, 그게 젊게 사는 노하우 아닐까요.”

제주=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