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을 바쳤다 파일럿 꿈 위해… 화가 꿈꾸던 나 대륙하늘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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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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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지샹항공 기장 40세 조은정 씨미대 졸업→호텔리어→美대사관 비서→미군기지 비행 연습→다시 美로→中 항공사 입사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중국에서 여성 파일럿으로 있는 지샹항공의 조은정 기장. 상하이=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중국에서 여성 파일럿으로 있는 지샹항공의 조은정 기장. 상하이=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엔진 레버 2개를 차례로 끌어 내렸다. 안전벨트 사인을 끄자 공항 게이트와 비행기 출입문을 잇는 브리지가 동체를 가볍게 흔들면서 연결된다. 콕핏(항공기 조종석)의 창문으로 마지막 승객이 나간 걸 확인한 뒤 헤드셋을 벗었다. 27일 오전 1시 40분. 중국 상하이(上海) 푸둥공항에 착륙한 그는 이날로 제트기 비행 3000시간을 채웠다. 3000시간은 항공사들이 기장을 스카우트할 때 제시하는 경력의 기준이다.

중국 지샹(吉祥)항공의 조은정 기장(40). 160cm 정도의 키에 가늘디가는 손목. 제복은 또 왜 그리 헐렁하게 보이는지…. 기장 표식인 소매의 노란선 4개가 없었으면 에어버스320의 조종간을 쥔 파일럿이라기보다 공항 보안요원 정도로 보인다. 조 기장은 중국 유일의 한국인 여성 기장이다. 그것도 바닥에서 출발해 하늘에서 꿈을 이룬 흔치 않은 사례다.

조 기장이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한 건 29세 때인 2001년. 한양대 미대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 가 우연히 호텔에 관심이 끌려 서울 힐튼호텔에서 일할 때였다. 당시 그곳은 외국인 기장들이 자주 묵었다. 그중 한 명이 항공특송회사인 페덱스의 미국인 여기장이었다. “긴 머리에 제복을 입은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체크인을 하는 그를 붙잡고 어떻게 파일럿이 됐냐고 물었죠.”

하지만 서른이 다 된, 게다가 시력도 안 좋은 여자를 받아줄 조종학교는 국내에 없었다. 백방으로 알아본 끝에 경기 오산 미군기지에서 경비행기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한국인은 기지 출입 자체가 불가능했다.

결국 조 기장이 선택한 건 미국대사관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미대사관에서 일하면 오산기지 출입증이 나올 거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원서를 넣었는데 3번 연속 떨어졌죠.” 낙담하던 차에 대사관에서 연락이 왔다. 토머스 허버드 대사 부부의 비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대사관에서 일한 지 3개월째. 그는 허버드 대사에게 자신의 꿈을 말했다. 그러자 대사가 “한국 여성들은 다들 소극적인 것 같던데 미스 조는 다르다. 적극 밀어주겠다”며 기지 출입증을 내줬다.

첫 관문을 통과했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오산에서 배운 비행기는 프로펠러로 가는 세스나기. 70시간만 교육을 받으면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데 조 기장은 일 때문에 주말에만 가서 비행을 해야 했다. 결국 남들은 몇 달이면 따는 면허를 1년 이상 걸려 땄다.

그는 2004년 미국 플로리다로 갔다. 그곳에서 좀 더 큰 비행기 조종을 배운 뒤 교관자격을 따기 위해서였다. 교관자격을 따 비행시간을 채우면 제트기에 도전할 수 있어서다. “한번은 눈이 퉁퉁 붓도록 엉엉 울었어요. 비행을 가르쳐준 교관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하지만 그가 눈물을 쏟은 게 단지 수업 때문이었을까. 조 기장은 미국에서 스쿨버스 운전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2005년 교관자격을 딴 뒤 중국으로 갔다. 항공산업이 급팽창하는 중국은 항상 교관이 부족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네이멍구(內蒙古) 바오터우(包頭)에서 중국인들을 가르쳤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성실함을 알아준 해당 교관학교의 고문이 그를 신생 항공사인 지샹항공에 추천했다. 조 기장은 이 고문을 지금도 ‘중국 아빠’라고 부른다. “2007년 9월이었어요. 아직 정식 입사가 안 됐는데 지샹항공에서 창립 1주년이라며 상하이로 급히 오라는 거예요. ‘행사장에서 발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때는 발음도 잘 안되던 중국어로 인사말과 포부를 무조건 외워서 갔지요. 제 생각이 맞았더군요.” 그는 이후 부기장을 거쳐 작년 초 기장 시험을 통과했다.

조 기장은 작년 11월 휴가차 한국에 왔을 때 모교(경기 이천 양정여고) 초청으로 후배들에게 강연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한테 갖고 있는 편견보다 더 무서운 건 자기가 스스로에게 갖고 있는 편견이다. 하고 싶으면 도전하라. 그리고 준비하라. 언젠가 기회는 온다”고 말했다.

미혼인 조 기장은 어느덧 마흔이 됐다. 마흔이 넘으면 신체검사가 1년에 한 번에서 두 번으로 늘어난다. “중국에서는 기장 정년이 60세예요. 아직 그때까지 조종석에 앉아 있던 여자 기장이 없다고 하네요. 그 나이까지 일하는 것도 제 목표예요.”

상하이=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
#여성 파일럿#조은정#지상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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