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비닐끈 볼펜’ 비엔날레 출품한 9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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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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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눈길 끈 배유나 양

《만약 당신의 어린 딸이 뭔가를 정성들여 만들었다면 당신은 딸에게 그 창작물에 대해 얼마나 칭찬하고 격려해 주겠는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서울외국인학교 4학년 배유나 양(9)의 어머니 유재신 씨(39)는 어느 날 딸이 만든 휴대전화 줄을 보고는 “예쁘다”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동네 문구점에서 파는 형형색색 비닐 끈들을 자기만의 방법으로 엮어 만든 것이었다.》

미국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유 씨는 한국의 주입식 교육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제만 주고 한껏 창의력을 발휘하게 하는 미국과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그래서 딸을 미술학원에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유 씨는 역시 미술을 공부한 유나 양의 이모들을 집으로 불러 딸의 ‘작품’들을 한껏 자랑했다. 한 이모가 말했다. “유나야, 볼펜 심지에 끈을 엮어 개성 있는 볼펜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지난달 18일 시작해 11월 4일까지 열리는 ‘2009 광주 디자인비엔날레’의 최연소 참가 작가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유나 양은 틈틈이 비닐 끈을 엮어 만든 60여 개의 볼펜을 이 행사 프로젝트 전시회의 한 코너인 ‘살림’전에 내놓게 됐다. 유나 양의 이모와 친분이 있던 최미경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큐레이터(49·디자인기획사 ㈜가슴 대표)가 이 볼펜들을 눈여겨봤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디자인이라고 하면 새로운 개념, 혹은 세련되거나 외국에서 온 것들을 떠올리죠. 잘못된 생각입니다. 유나의 볼펜은 사람들이 사소하게 지나칠 수 있는 것(비닐 끈과 볼펜 심)을 소중하게 주목한 독창성이 있어요. 기분 좋은 만족을 주고요. 제품력도 그럴싸했죠. 엮음의 마무리가 깔끔하고, 특히 끈끼리 색을 조합하는 ‘컬러 콤비네이션’이 인상적이었어요. 검은색과 회색으로 시크하게 표현하거나, 빨간색과 하늘색을 매치하기도 했거든요.” 최 씨의 말이다.

‘유나 표’ 볼펜은 급기야는 광주 디자인비엔날레를 방문한 이탈리아의 유명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알레산드로 멘디니 씨(78)의 관심도 사로잡았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디자인을 기치로 내건 ‘멤피스 디자인그룹’의 대표 주자로, 이탈리아 디자인회사 ‘알레시’에서 사람 모양의 와인 오프너를 디자인했던 그다. 멘디니 씨는 유나 양의 볼펜에 대해 “생동감이 넘친다”고 평가한 뒤, 안내를 하던 최 씨의 양해를 얻어 이 볼펜 하나를 가져갔다.

유나 양의 가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외할아버지인 유영구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도 전시장을 찾아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유나 양의 볼펜이 전시된 광주 디자인비엔날레의 ‘살림’전에는 다 쓴 수세미 5만 개를 꽃 모양으로 만들어 커튼처럼 드리운 작품, 태국에서 화장(火葬)할 때 쓰는 종이로 만든 가구, 독특한 문양의 중국 손톱깎이 200여 개 등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 18일 이곳을 방문한 유나 양은 “내 볼펜이 이곳에 있다는 게 신기하다”며 마냥 기뻐했다.

16일 동아일보를 찾은 유나 양은 한쪽 다리는 초록색, 다른 한쪽 다리는 분홍인 안경을 쓰고 있었다. 이런 안경테는 어디서 구했냐고 묻자 “안경의 두 다리 색이 굳이 똑같을 필요가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안경점에 부탁해 다른 색으로 맞췄다는 것이다. 양쪽에 손잡이가 있는 컵을 디자인했던 네덜란드 산업디자이너 리하르트 휘텐 씨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왜 컵의 손잡이가 한 개만 있어야 할까요?”

유나 양의 어머니 유 씨는 “이젠 한국적인 것을 만들어 봐도 좋겠다”며 한국의 매듭을 만드는 실을 유나 양에게 구해다 주기도 했단다. 댄스가수 그룹 ‘쥬얼리’의 서인영을 좋아하고, 가족 모임 때 엄마의 화장품을 빌려 눈 화장까지 하는 ‘못 말리는’ 초등학생 딸을 굳이 말리지 않는 어머니다. “아이의 재능은 타고 나는 것이지만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부모의 몫”이란다. 유 씨의 말은 “우리네 살림살이(living)의 살림은 다소 어눌하고 좀 틀렸을 수도 있다. 엉뚱할 수도 있다. 살림은 또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할 때의 살림이 될 수도 있다. 분위기를 띄우는 자극 말이다”라는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측의 전시 의도와 꼭 닮아 있었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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