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꼭 61년째인 9일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서 만난 원폭 피해자 김한수(88·사진) 옹은 당시 일하던 조선소의 일본인 감독관들이 한국인 부상자들을 놔둔 채 달아나 버렸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했다. 김 옹은 나가사키 피폭 상황을 정확히 증언할 수 있는 국내의 몇 안 되는 생존자다.
그는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경 미국이 투하한 원폭이 떨어진 곳에서 불과 3.2km 떨어진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일했다.
당시 김 옹은 일본인 조장의 시계를 고쳐 주다 창문 너머로 순식간에 지나가는 새파란 섬광을 봤다.
일본인 조장은 “적이다!”라고 외치며 혼자서 어디론가 도망을 갔다. 김 옹도 그의 뒤를 따랐지만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덮치면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방공호로 달려가 보니 온몸이 시커멓게 탄 시체만이 즐비했다. “시체 타는 냄새로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고 회고한 김 옹은 미간을 찌푸렸다. 시내 곳곳에는 원폭의 후폭풍 탓에 사지가 떨어져 나간 시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바닷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체가 쌓여 있었다.
설마 원폭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김 옹은 그제야 자신의 등에서도 피가 철철 흐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한국인은 병원 문턱에도 가기 힘들었다.
“조선소에서만 한국인 징용자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는데도 일본인 관리자들은 속속 공장을 떠났어.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생지옥이었지.”
몇몇 생존자는 부상자를 공장 숙소로 옮기고 조를 짜 이들을 돌봤다. 대다수 부상자가 화상으로 입조차 벌리지 못해 대나무를 입에 꽂고 멀건 죽을 먹였지만 합병증으로 대부분 숨을 거뒀다.
생존자들은 8월 15일 광복이 된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김 옹은 뒤늦게 소문을 듣고 1945년 9월경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김 옹은 1944년 봄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 자신의 집에서 징용에 끌려가 ‘자살 잠수함’에 쓰이는 동(銅) 파이프를 만들었다.
자살 잠수함이란 앞쪽에 폭탄을 달고 적 군함을 향해 돌격하는 바다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한국인 징용자에겐 콩깻묵을 쪄 만든 밥과 바닷물에 고구마 넝쿨을 넣어 끓인 국이 유일한 먹을거리였다.
“남의 나라에서 짐승 취급을 받다 짐승만도 못하게 죽어간 동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일본은 어떤 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러야 해.”
김 옹은 아흔이 다 된 나이에 다시 일본어를 익히고 있다. 눈을 감기 전 일본 정부를 직접 찾아가 사과라도 한마디 듣기 위해서다.
대전=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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