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근씨 ‘한양大→부상→삼성→은퇴’딛고 개군中 감독으로

  • 입력 2004년 12월 14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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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욱 기자
변영욱 기자
1983년 6월 멕시코에서 열린 제4회 세계 청소년축구대회는 한국 대표팀이 ‘세계 4강’의 신화를 만든 대회다. 당시 폴란드와의 3, 4위전. 결과는 1-2 패배였지만 선제골을 넣어 깊은 인상을 심은 선수가 있었다. 18세의 서울 우신고 3학년생 이기근(李基根·사진).

이 씨는 그 뒤 한양대에 진학했다. 그가 재학하던 4년 동안 한양대는 전국대회에서 7차례나 우승했다. 프로무대에선 1988년과 1991년 2차례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화려한 영광 뒤에 시련이 찾아왔다. 1992년 부상 등으로 한동안 그라운드를 떠났다가 1996년 신생팀 삼성에 참여했으나 2년을 못 뛰고 34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쓸쓸히 은퇴했다.

이제 불혹에 접어든 그가 제2의 축구인생을 시작했다. 3일 창단한 경기 양평군 개군중(전교생 159명) 축구부 감독으로 ‘제2의 축구 인생’을 시작한 것. 그가 굳이 시골 학교의 신생 축구부를 맡은 데는 이유가 있다. 새로운 축구 교육을 실험하기 위해서다.

내년 이 학교 축구부에 진학할 학생은 모두 31명. 그의 ‘얼굴’을 보고 전국 각지에서 지망해 온 학생들이다. 그는 학생들을 축구만 잘하는 기계로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공부하는 선수’를 목표로 한다. 개군중 축구부는 모두 한 반에 편성돼 오전에는 영어와 한자, 컴퓨터 위주로 수업을 받는다. 훈련은 오후에만 한다. 오후에도 일주일에 4시간은 원어민 교사에게서 영어회화 수업을 받는다.

축구 선수로 대성하지 못하더라도 축구행정가 등 축구와 관련된 여러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체계적 훈련이 가능한 학교 축구의 장점과 축구 자체를 즐기는 클럽축구의 장점을 접목한 것이다.

“한 명의 스타를 위해 많은 학생을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 모두가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게 감독의 진짜 역할이죠.” 그가 그라운드로 돌아온 진정한 이유다.

양평=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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