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작가 이문열씨, 이승서 못이룬 '北부친 상봉'

  • 입력 1999년 8월 8일 23시 02분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헤어진 지 49년만에 부둥켜안아 보리라던 꿈은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6일 6·25 전쟁 와중에 월북한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씨를 만나기 위해 중국 옌지(延吉)로 날아갔던 소설가 이문열(李文烈·51)씨.

그러나부자상봉의꿈은 도착 이튿날인 7일 밤 북으로부터 돌아온조선족중개인의 전화 한 통으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부친께서는 3월22일 노환으로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동행한 형 연(然·59·소설가)씨는 그 자리에서 어린아이처럼 소리내어 엉엉 울었다. 그나마 초등학교 5학년 때 헤어져 아버지를 기억하는 형이나 누릴 수 있는 슬픔이었다. 두 살 때 헤어져 아버지를 불러본 기억이 없는 이문열씨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망연자실, 분노, 안타까움…. 아버지의 작고 소식을 들은 수시간 후인 8일 새벽 현지에서 동아일보와 전화인터뷰를 한 이씨는 “아버지를 만나러 왔는데 내가 상제(喪制)가 되다니…”라며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5년 전 자신의 중편소설 ‘아우와의 만남’에서 북의 남동생과 만나 망제(望祭)를 지내는 이야기를 썼던 이씨. 그 상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9일 이씨는 형 연씨와 함께 중국 투먼(圖們)시 두만강가에서 아버지가 묻힌 함경북도 어랑군 부호리를 바라보며 망제를 지내기로 했다.

“서울에서 아버지 드리려고 가져온 안동소주를 제상에 올릴 겁니다. 영혼이나마 아버지가 나고 자란 땅의 물로 빚은 그 술을 드시라고….”

이씨가 백방으로 부친 상봉에 애쓰기 시작한 것은 작년말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후. 옌지 조선족을 통해 은밀히 보낸 편지에서 아버지는 북에서 낳은 4남매 이름을 거명하며 ‘이제는 자나깨나 너희들 피붙이의 자연스러운 연결뿐이다. 통일이 되는 날 너희 형제들 상봉에 이 편지가 무슨 계기가 되기만 바란다’고 썼다. 이씨는 돌이켜보면 부친의 편지가 “남북의 자식을 이어주려는 아버지의 유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1월 북한 김정일 노동당총비서에게 “아버지 생전에 만날 수있도록 방북을 허가해 달라”는 내용의 공개편지를 써서 부자상봉을 호소하기도 했다(본보1월16일자). 이번 옌지에서의부자상봉은 ‘KBS일요스페셜’팀이8·15특집 프로그램으로 은밀히추진해 온 것이었다.

“북한 당국이 아버지 작고사실만 알려줬어도 이렇게 기막히지는 않을 겁니다. 올들어 여러 경로로 상봉을 추진했는데 그때마다 북한측은 ‘원칙적으로 동의하지만 부친의 연세(올해 84세)도 있고 하니날이 따뜻해지면 시도해보자’는등의 구실로 차일피일미루기만 했어요. 이번에 서울에서 떠날 때도 아버지가 연로해서 못 나오시면 이복동생이라도 만나길 기대하고 왔는데….”

이씨는 중개인으로부터 북한의 동생 4명 중 유일한 남동생 만경씨(35)가 육종학자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업연구소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상봉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혹시라도 북한 체제에서 남쪽 형들 때문에 아우의 처지가 힘들어지지 않을까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루속히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산 1세대는 대부분 70, 80대로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우리 가족처럼 죽음으로 이승에서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일이 더 이상 되풀이돼선 안됩니다.”

〈정은령기자〉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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