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남은 얼굴]최영미/할머니 생각만 하면…

  • 입력 1999년 2월 7일 20시 53분


가끔씩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들이 생각난다. 오늘처럼 흰 눈이 내려 온 세상을 덮을 때면 창문 너머 눈싸움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 눈은 추억 속으로 미끄러져 달음질친다.

할머니는 늘 수줍은 듯 웃고 계셨다. 쪽비녀를 풀면 태어나 한번도 자른 적이 없는 치렁치렁한 머리가 엉덩이까지 내려왔다. 촘촘한 참빗에 물을 적셔 그 히끗히끗한, 무슨 왕조의 유물과도 같던 긴 머리를 정성스레 빗으시면 난 옆에 쪼그리고 앉아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난 양 즐거워 했다. “할머닌 왜 파마 안 해?”

쓰리고 아픈 일들이 많아 다시 들여다보기 싫은 유년기도 ‘할머니’가 들어가면 환해진다. 내 아버지의 생모(生母)이나 기르지는 않아 왕래가 뜸했던, 그래서 나와 동생들이 ‘원주 할머니’라 불렀던 그분이 우리와 함께 산 것은 세검정으로 이사오면서부터였다. 막내 고모와 삼촌, 그리고 할머니까지 삼대가 한 집에 모여 복작대던 그 시절, 점심은 대개 밀가루 음식이나 강냉이죽으로 때웠다. 수제비에 질린 내게 할머니가 손수 빚으신 칼국수는 별미였다. 마루에 앉아 커다란 다듬잇돌 위에 밀가루반죽을 펼쳐놓고 방망이로 쓱쓱 미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원주에서 다니던 성당의 지학순 대주교가 구속되자 “우리 지주교 내놓아라!”고 외치며 가두시위에 참여했던 할머니는 화통하며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

고모가 시집가고 노총각이던 삼촌도 장가간 뒤에 할머니는 우리 곁을 떠나 다시 원주로 가셨다.

할머니가 다시 내 인생에 등장한 것은, 당뇨병을 앓다 쓰러지셨을 때였다. 서울의 아들집에 실려와 세상을 뜨기 며칠 전에 할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앉혀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한다.

“에미, 애비야. 맏이 너무 구박하지 말아라. 애가 인정이 많아 앞으로 잘 될거다.”

언제나 내 편이셨던 할머니는 데모하다 잘려 집에서 찬 밥 신세이던 날 걱정하셨던 게다.

난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난 스물두살의 대학생. 첫사랑에 미쳐 있었던가. 후회는 언제 해도 늦다.

최영미 <시인>

▼ 약력

·61년 서울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시집:‘서른,잔치는 끝났다’‘꿈의 페달을 밟고’

·산문집:‘시대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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