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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해골에 다가가는 아이’… 生死의 거리는 짧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입력 2022-07-04 03:00업데이트 2022-07-04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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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해골에게 묻는다 스위스 바젤의 도미니쿠스 수도원 공동묘지에는 ‘죽음의 춤(Danse Macabre)’을 소재로 한 벽화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해골 둘이 아이를 둘러싸고 춤추고 노래하는 그림이다. 해골이 노래한다. “아장거리는 아가야, 너 역시 춤을 배워야 해/네가 울든 웃든 너 자신을 지킬 수 없어/네가 젖먹이라고 할지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아무 소용이 없지.” 아이가 놀라서 말한다. “아, 엄마. 어쩌면 좋죠/앙상한 사람이 절 데려가려고 해요/엄마 절 지켜줘요/전 춤을 배워야 하는데, 죽기엔 아직 일러요.”

보호자가 졸고 있는 틈을 타 해골 모양의 사신이 아이를 빼앗아가는 장면을 그린 다니엘 호도비에츠키의 동판화(1780년). 사진 출처 프린스턴대 미술관
이 노래가 그토록 강렬하게 들리는 이유는 어린아이에게도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죽음은 대체로 노인에게 찾아오긴 하지만,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게 죽음이기도 하다. 18세기 독일 화가 다니엘 호도비에츠키의 1780년 동판화 역시 그런 냉정한 사실을 주제로 삼는다. 엄마 혹은 유모가 졸고 있는 틈을 타서 해골 모양의 사신이 아이를 빼앗아 가고 있다.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당신 아이가 죽음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해골이 아이를 꾀어내자 놀란 엄마가 아이를 꼭 끌어안는 모습을 그린 이숭의 ‘고루환희도’(위쪽 그림). 죽음은 아이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래쪽 그림은 잡화류를 파는 행랑과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이숭의 ‘시담영희도’.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어른뿐 아니라 아이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그림은 중국에도 있다. 그중에서도 남송(南宋) 시절 궁정화가였던 이숭(李嵩·1190∼1230년경 활동)의 ‘고루환희도({루幻희圖)’가 단연 주목할 만하다. 커다란 해골이 작은 해골 인형을 가지고 아이를 꾀어내고 있다. 해골의 신기한 인형 놀이에 매혹된 아이가 그리로 다가가자, 아이 엄마 혹은 유모가 아이 뒤를 부랴부랴 쫓는다. 왼편에는 결코 아이를 뺏기지 않겠다는 양 엄마가 단호한 자세로 아이를 꼭 안고 있다.

이 흥미로운 그림은 도대체 어떤 장면을 묘사한 것일까. 일설에는 이 그림이 가설무대의 인형극 공연 모습을 묘사했다고 하나, 그림에 가설무대는 없다. 등장인물들이 속이 훤히 보이는 얇은 옷을 걸친 것을 보면 늦봄이나 여름날의 한 장면 같다. 그래서 이 그림이 단오절의 한 장면을 묘사한 거라고 보기도 한다. 생명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가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에게 다가가고 있으니, 이것은 혹시 생명과 죽음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생과 사의 충돌 혹은 모순을 상징한 것일까. 그림 왼편 위쪽에 있는 ‘오리(五里)’라는 길 표지판은 인생이란 결국 하나의 여행이라는 말을 전하는 것일까. 아니면, 진정한 도(道)를 찾으라는 뜻이라는 제안일까.

왼편에 그려진 물건들을 감안할 때, 이 그림은 일단 화랑도(貨郞圖) 장르의 연장선에 있다. ‘화랑’이란 거리를 다니면서 일용잡화류를 파는 행상을 말한다. 이숭은 저명한 궁정화가였지만 ‘화랑도’ 같은 풍속화 역시 즐겨 그렸다. 궁정화가 이종훈(李從訓)에게 배워 저명한 화가가 되기 전에는 소박한 목수에 불과했으니 그 풍속화들은 젊은 시절 삶의 체험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루환희도’가 단순한 화랑도는 아니다. ‘고루환희도’에 나오는 ‘고루’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이 그림의 가장 중요한 소재는 해골이다. 실로 이숭은 해골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이숭이 그린 화랑도에는 아이들, 아이 엄마, 행상뿐 아니라 해골이 종종 등장한다. 명나라 기록에 의하면, 이숭은 ‘고루환희도’나 ‘화랑도’ 이외에도 해골이 수레를 끄는 모습의 ‘고루예거도({루(열,예)車圖)’, 동전 한가운데 해골이 앉아 있는 모습의 ‘전안중좌고루도(錢眼中坐{루圖)’ 같은 해골 소재 그림들을 다수 그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해골은 죽음을 상징하니, 이숭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던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이 특이한 해골 그림을 통해서 이숭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보는 즉시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 ‘고루환희도’의 궁극적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죽음은 부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취지의 ‘죽음의 춤’ 장르화라는 해석, 단오절의 의미를 새기고 있는 그림이라는 해석, 남송 황실의 퇴폐적인 향락 문화를 에둘러 비판하는 그림이라는 해석, 괴로운 백성들의 삶에 동정을 표하는 그림이라는 해석, 전진교(全眞敎)라는 종교의 교의를 구현한 그림이라는 해석 등 그간 제출된 해석만 해도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중국 문화 전통에서 해골 이야기는 ‘장자’의 ‘지락(至樂)’에서 먼저 나온다. 장자가 해골에게 다시 삶을 받겠느냐고 권하자, 해골은 군주도 신하도 없는 죽음의 세계에 머물겠노라며 그 제안을 사양한다. “내 어찌 인간 사회의 고단함을 다시 반복하겠는가(復爲人間之勞乎).” 이러한 메시지를 계승한 전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실은 환상이고 인간은 결국 백골이 되기 마련이니, 너 나 할 것 없이 미망(迷妄)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아직 미망에 사로잡힌 (우리) 보통 사람들은 오늘도 허무한 일상 속을 그림자처럼 걷는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의 주인공처럼.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불쌍한 연극배우에 불과할 뿐/무대 위에서는 이말 저말 떠들어대지만/결국에는 정적이 찾아오지, 이것은 하나의 이야기/바보의 이야기, 분노에 차 고함치지만/아무 의미도 없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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