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푸틴의 돈줄 올리가르히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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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00년 집권하자 러시아의 지배계층이 교체된다는 전망이 무성했다. 전임자인 보리스 옐친의 ‘돈줄’ 올리가르히(신흥재벌)는 가고 이들의 사설 경호로 근근이 살아가던 실로비키(제복 입은 남자들)가 뜬다는 예측이었다. 푸틴 스스로가 연방보안국(FSB·KGB의 후신) 출신인 실로비키다. 실제로 푸틴은 임기 초반 ‘적폐 세력’ 올리가르히 숙청으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멤버만 바뀌었을 뿐 올리가르히는 지금도 건재하다.

▷올리가르히는 1991년 소련 해체 후 국영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탄생했다. 노점상 창문닦이 기계공으로 일하던 20, 30대 중 극소수가 발 빠르게 국유재산을 헐값에 사들이면서 금융 석유 언론 항공업계를 좌우하는 갑부가 됐다. 세계 주요 도시에 저택을 두고 비싼 미술품과 초호화 요트를 수집하는 이들 신귀족은 빈부격차가 심한 러시아에선 “고아원 앞에서 재미 삼아 돈뭉치 태우는 집단”으로 미움 받는다.

▷푸틴의 숙청에도 소수의 올리가르히는 살아남았는데 대표적 인물이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그는 무명의 푸틴을 총리로 발탁할 정도로 권력이 있었지만 푸틴이 대통령이 된 후로는 영국 첼시의 구단주가 돼 정치와 거리를 뒀다. 이번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비난 여론에 못 이겨 첼시 매각을 공언한 인물이다. 그처럼 경제 권력에 만족해 숙청을 피한 1세대와 실로비키 출신 2세대 올리가르히 110명이 푸틴의 충성스러운 돈줄 역할을 하며 러시아 부의 35%를 거머쥐고 있다.

▷올리가르히는 정치적 숙청에 대비해 자산을 해외로 빼돌려 놓는다. 대표적인 선호 지역이 러시아와 관계가 냉랭해 범죄자 인도 요청이 먹히지 않는 영국 런던으로 ‘런던그라드’로도 불린다. 그런데 이런 자산 관리 방식이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를 압박하는 수단이 됐다. 미국 영국 독일을 비롯한 서구 주요 국가들이 올리가르히를 푸틴의 전쟁 자금줄로 보고 이들의 자산을 동결하거나 압류하고 나섰다. 이미 러시아 상위 20대 부자들의 총자산 중 3분의 1인 800억 달러(약 97조 원)가 증발했다고 한다.

▷푸틴이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는 미지수다. 올리가르히의 자산이 대부분 지인의 명의로 돼 있어 찾기가 쉽지 않다. 영국의 경우 이들의 자금 동결로 영국 경제도 피해를 입는다는 우려가 나온다. 올리가르히의 잦은 송사로 재미 본 로펌들이 벌써 방어막을 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최대의 올리가르히는 푸틴이다. 자산 규모가 세계 최고 부자 일론 머스크(260조 원)에 버금가는 240조 원으로 추정된다. 그의 자산도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것이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푸틴#실로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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