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호명[동아광장/김금희]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입력 2021-06-23 03:00수정 2021-06-23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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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된 순간 받아 든 은사님의 선물
삶의 희망 노래하는 ‘덴동어미화전가’
책 안팎에서 가만히 부르는 따뜻한 진심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올여름 신작 소설집을 내면서 은사님께 책을 보내드렸다. 작가가 되어 첫 책을 내고 자연스럽게 이어져 오는 일이지만 사실 처음 보내드릴 때는 작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학부를 졸업한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 나를 아실까 망설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뭔가 쑥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어떻게 보면 피하고 싶어지기도. 그런데도 은사님께 책을 보낸 건 어떤 응답을 하고 싶은 것에 가까웠다. 고전문학을 담당하신 은사님 수업은 내가 재학 시절 내내 한 과목도 빼놓지 않고 수강한 ‘최애’ 수업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더 젊었던 은사님 수업은 매 순간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은사님이 열어주는 세계에서는, 집안을 말아먹는 ‘요물’로 그려지던 여우누이가 가부장제의 억압 아래 자신의 재능을 포기하지 않던 여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여성이 담당하는 의식주에 관한 노동은 자기 삶을 책임지는 이들만이 행할 수 있는 존엄한 노동으로 설명되었다. 은사님은 평생 이른바 ‘바깥일’을 하느라 정작 스스로는 밥 한 끼 챙겨 먹거나 셔츠 한 장 빨 줄 모르는 이들에게 비판적이었다. 자신의 삶을 돌보는 행위를 그렇듯 타인에게 내맡긴 채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까지도 내게 묵직하게 남아 있다. 대학 시절 은사님 말씀은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해 오랫동안 평가 절하함으로써 노동력을 값싸게 누려 온 남성들에 대한 일침이었지만, 비용만 지불한다면 전보다 더 쉽게 ‘고객’ 혹은 ‘사용자’가 될 수 있는 지금은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보내고 며칠 지나 은사님에게서 택배가 도착했다. ‘머리가 좋아지는 들기름’이라고 쓰신 기름 두 병과 당신이 편저하신 책이었다. 그동안 책을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그 전언이 애틋하고 감사했다. 책을 내고 난 뒤 번아웃된 채 기분이 한창 가라앉아 있던 때였기 때문이다. 마치 어깨를 툭 쳐주는 손길처럼 느껴졌다. 책 중에 ‘덴동어미화전가’부터 읽기 시작했다. 화전가는 조선시대 여성들이 봄날 진달래 화전을 함께 부쳐 먹으며 자연을 즐기는 과정을 가사 형식으로 담아낸 것이다. 그중 ‘덴동어미화전가’는 덴동어미가 겪은 인생의 파고를 통해 삶의 아픈 순간들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품 넓은 서사를 담고 있다.

덴동어미는 중인 신분에서 최하층으로 밀려나 살 집 하나 마련하지 못한 채 장사를 다니고 남의집살이를 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좀 숨이 트이는가 싶다가도 재해와 돌림병으로 모든 걸 잃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불행이 닥치고, 끝내는 화재로 남편이 죽고 귀한 자식마저 장애를 입는다. 그런데도 덴동어미는 삶의 불운이 아니라 매해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처럼 매번 겪고 일어났던 삶의 갱신을 노래한다. 화전놀이에 참석해 눈물짓는 여성들 이름 하나하나에 봄 춘 자를 붙여 그들을 불러주는 장면이 압권인데, 자기 불행에 골똘히 침잠해 있다가도 그런 누군가의 부름에 자세를 고쳐 앉고 웃음을 지어 보이는 장면은 한없이 감동적이었다. 덴동어미는 호명의 대상을 꽃놀이 참석자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인물과 신화 속 주인공, 더 나아가 임금님에게까지 확장시키는데 야트막한 어느 산속의 진달래꽃 덤불, 그 옆에 모여 앉은 여성들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계층이나 현실의 제약 없이 모든 세상을 불러들이는 장면은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책을 붙들고 있는 나에게조차 만화방창(萬化方暢)한 봄기운을 전해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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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책을 읽어 내려갈 즈음, 나는 한 문장의 오기를 잡은 은사님의 필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혹시 수정자를 표시한 책을 잘못 보내셨나 처음에는 생각했다. 그리고 몇 장 더 읽었을 때 원문이 판독되지 않아 동그라미로 인쇄되었던 문장 옆에 “덴동어미 하는 말이 자네의 뜻 풀어내려”라고 연필로 적은 부분을 한 번 더 만났다. 그제야 나는 은사님이 직접 오자와 탈자를 바로잡아 내게 보내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전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내가 내용의 정오를 판단하기는 어려울 텐데도, 은사님은 그것이 저자로서의 책무이기에, 혹은 제자가 책을 최대한 정확히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셨던 것이었다. 책을 선물받은 뒤 책장에 꽂아두었다면 알지 못했을 은사님의 세심한 마음과 책을 쓰는 사람으로서의 태도. 책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오래전 강의실에서 들은 말들과 함께 은사님의 이 가만가만한 필적들을 마음에 담아두었다. 앞으로도 봄날의 덴동어미처럼 언제고 나를 흔들고 일어나 있게 할 고마운 호명이었다.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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