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공부하느라 바빠서…”[삶의 재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5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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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아버지 상황이 안 좋은데, 아이들도 병원에 좀 오라고 하시지 그러세요?”

암이 점차 말기로 향해 갈 때 나는 암 환자들께 아이들을 병원으로 오게 하라고 자주 권한다. 아이들이 옆에서 간병하면 여러 가지 좋은 효과가 있다. 간병하느라 지친 보호자는 잠깐이라도 쉴 수 있고 환자는 오랜만에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자녀들도 부모님이 얼마나 힘겹게 투병생활을 하고 있는지 직접 볼 수 있다. 여태까지는 부모님이 나를 돌봐왔지만 이제는 자신이 부모님을 돌봐야 한다는 것도, 부모님이 언제나 자기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암 환자들은 자녀들을 병원으로 오라고 하지 않는다. 특히 중고교생 아이를 둔 환자들이 더욱 그렇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아이가 부모의 암 투병으로 인해 상처받을까 봐 걱정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학교 공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고3 자녀가 있으면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영향을 줄까 봐 병원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아이들이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공부에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입시에 때가 있는 것뿐이다. 공부에는 때가 없고,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다. 입시 공부를 반년 미룬다고 해도 인생에는 생각보다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공부에는 때가 없지만 죽음에는 때가 있다. 특히 부모의 죽음 앞에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죽음을 피할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이의 성장을 위하는 길임을 대부분의 부모는 알지 못한다.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나고 나서야 후회한다. 아이에게 평생 남을 가슴속 한(恨)의 크기를 짐작하지 못한 채.

부모의 투병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 아이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배우게 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불행이 있다. 어떤 어려움도 가족은 끝까지 함께하면서 그에 맞서 나간다. 세상에는 오롯이 내가 견뎌내야 할 내 몫의 슬픔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그것 또한 지나간다. 인생이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지나간 후에 후회하는 것보다 지금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공부하는 것이 과연 미적분 배우는 것보다 덜 중요한 걸까? 수능 성적 1점보다 덜 중요하단 말일까? 학교 공부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우리는 아이들이 이런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단 말인가.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인생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김범석 서울대 혈액종양내과 교수


#암환자#아이들#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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