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 따랐을 뿐”, 면죄부 아니다[오늘과 내일/고기정]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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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문서 증거인멸에 정책 궤변논리 생산
‘정치공무원’으로 내몰리는 엘리트 관료들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어떤 정부든 임기 중반이 넘어가면 관료조직에서 먼저 변화가 시작됐었다. 정권에서 이탈하든지 정권을 포획해버리는 변화 말이다. 집권세력이 정국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려다 아예 관료들에게 접수되거나, 관료들이 기존 정권을 버리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집권 4년 차인 현 정부는 이런 틀에서 벗어나 있다. 정권 연장을 점쳐서인지 관료조직이 되레 정치 전위조직처럼 움직이고 있다. 공무원은 선출권력에 의해 엄격히 통제돼야 한다. 하지만 관료조직이 홍위병이 되면 정권의 일방향성이 낳는 오류를 교정할 기회를 놓친다. 지금이 그런 때일 수 있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직원들이 감사원 감사가 시작되자 월성 1호기 관련 문서 444건을 삭제한 게 ‘조직적 은폐’가 아니라고 했다. 증거인멸은 범죄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국정과제인 탈원전 정책을 수행하던 전도유망한 행시 출신 직원들이 청와대 보고문건까지 몽땅 삭제했는데, 이게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거다.

산업부는 한술 더 떠 적극행정에 대한 면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적극행정 면책은 공무원들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업무를 처리하다 일부 규정을 위반했더라도 고의나 중과실이 없으면 폭넓게 인정해주는 제도다. 탈원전 정책의 입안과 수행 과정이 적극행정이었다면 다른 직원들이 출근하지 않는 일요일 심야에 문건을 폐기할 이유는 뭔가.

국토교통부는 최근 전세금 급등이 저금리 때문이라는 공식 자료를 냈다. 임차인들의 전세자금 조달 비용이 낮아 전세 수요는 늘어난 반면 임대인들은 자본수익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월세를 선호하게 되면서 전세 물량이 부족해 전세금이 뛴다는 주장이다. 굳이 경제학 이론을 들이대지 않아도 이번 전세대란이 임대차 3법에서 발화됐음을 다들 안다. 저금리는 경제 주체들이 기간 간 비교에 따른 금리차를 인식할 때 규정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박근혜 정권 때도 저금리였지만 그때는 왜 지금 같은 대란이 없었나. 이런 정도의 논리를 주택정책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국토부 관리들이 생산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정부 정책은 정치집단의 선동이 아니다. 한쪽 자료만 취사선택하면 그건 거짓말이거나 궤변이 된다.

히틀러의 개인 변호사였던 한스 프랑크는 독일 치하 폴란드의 총독이 됐다. 유대인과 폴란드 국민 학살을 주도했던 그는 “민족에 이로운 게 법”이라고 주장했다. 티머시 스나이더 예일대 사학과 교수는 전시 독일의 법과 규칙이 보편적 정의와 합리성에 기초하지 않았던 이유를 당시 나치 부역 법률가들이 자기 확신을 통해 이 논리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법치를 파괴하려면 법률가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정책을 비틀려면 관료를 앞세워야 한다. 스나이더 교수의 지적을 조금 더 인용한다. “개인과 정부가 윤리를 놓고 공방을 벌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직업’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직업 구성원들이 스스로를 공동의 이해관계를 지닌 집단으로, 언제나 지켜야 할 규범과 규칙을 지닌 집단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자신감과 함께 일종의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직업 종사자들이 그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와 순간의 감정을 혼동할 경우, 그들은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을 말과 행동으로 옮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공적문서#증거인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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