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명건]사법부는 숨지 마라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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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건 사회부장
이명건 사회부장
2주 전 미국 워싱턴주 루이스카운티 지방법원 법정. R W 버저드 단독판사가 갑자기 법복을 벗어던지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재판 대기 중이던 구속 피고인 2명이 경비 소홀을 틈타 도주하자 직접 추적한 것이다. 수갑을 찬 두 피고인은 계단 세 층을 뛰어 내려갔다. “거기 서!” 판사는 뒤쫓으며 소리쳤다. 앞의 피고인이 계단 옆문으로 법원을 빠져나갔다. 몇 초 후 뒤의 피고인도 그 문을 열었다. 그 찰나 판사가 그를 덮쳤다. 앞의 피고인은 멀지 않은 곳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버저드 판사는 “적절하고 올바른 일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앞서 56년 전 미국항공우주국(NASA). 초고속 항공기 비행사 닐 암스트롱은 우주비행사가 되기 위한 면접시험을 봤다. 달 탐사를 목표로 우주비행을 하는 ‘제미니 8 계획’에 지원한 것이다. “왜 달에 가야 하냐”는 질문에 암스트롱이 대답했다.

“성층권을 비행해 본 적이 있다. 여기서 올려다보면 그곳이 어떤지 알 수 없다. 어디에 있는지, 그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게 달라진다. 우주 탐사는 관점을 바꾼다. 달에 가게 되면 그 전까지 못 봤던 것을, 오래전에 봤어야만 할 것을 보게 될 것이다.”(영화 퍼스트맨) 이후 7년이 지난 1969년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 표면을 밟았다.

현재 한국 사법부는 어쩌면 과거 미증유의 ‘달 탐사’ 같은 논란에 휩싸였는지 모른다. 재판 개입 의혹 사건에 대한 특별재판부 도입 말이다. 위헌 여부를 놓고 법조계와 학계, 정치권에서 백가쟁명이 한창이다.

복잡하게 얽힌 쟁점의 큰 기둥은 2개다. 특정 사건 재판을 사후에 특정 재판부에 맡길 수 있는지 없는지, 그리고 재판부를 구성할 현직 판사 후보 추천을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사법부 외부 인사들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다.

위헌이라는 측은 특별재판부가 공정한 재판을 보장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재판부 구성이 조작돼 판결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위헌이 아니라는 쪽은 법원의 현 사건 배당 체계로는 ‘제 식구 감싸기’ 판결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헌법 수호를 위해 사건 연루 의혹이 없는 판사들로 특별재판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별재판부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다음 달 10일경 기소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은 통상 절차에 따라 서울중앙지법 7개 부패전담부 중 한 곳에 배당된다. 각 부 재판장 중 일부는 법원행정처 심의관이나 대법원 재판연구관 출신이다. 배석 판사 중에도 같은 출신이 있다. 특별재판부에 반대하는 측은 의혹 연루 판사가 있는 부에 사건이 배당될 경우 법원 자체적으로 제척·기피·회피 제도를 시행하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기준을 사법부에 믿고 맡기지 못하겠다는 측은 국회의 특별재판부 입법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3권 분립을 강조하는 반론에 대해 법치주의를 훼손한 사법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반박이 나오고 있다.

사정이 이럴진대 당사자인 사법부는 개인 의견을 전제로 위헌 주장을 펴고 있다. 숨지 말고 공식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판사로선 이례적으로 직접 도주 피고인을 붙잡은 버저드 판사같이 새로운 길을 나서야 한다. 그처럼 ‘적절하고 올바른 일’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특별재판부 도입 취지가 담긴 대안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름이 특별재판부일 필요는 없다. 그걸 갖고 백가쟁명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래야 위헌 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암스트롱은 달에서 바라보던 지구를 엄지로 가린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거인이 아니었다. 아주, 아주 작았다.” 사법부는 거인이 아니라고 언제 깨달을까.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
#사법부#재판 개입#특별재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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