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주성원]‘집에서 집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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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정상, 더 오를 데가 없다.” 1977년 이 유명한 무전으로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 등정을 알린 산악인 고상돈. 하지만 그에게 더 오를 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도전을 그치지 않았던 그는 1979년 미국 매킨리 등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2009년 여성 산악인 고미영의 목숨을 앗아간 낭가파르바트의 정상을 처음 밟았던 산악인은 헤르만 불이다. 1953년 낭가파르바트를 오른 그는 하산 도중 일몰을 맞아 8000m 고지에서 선 채로 밤을 지새웠다.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건지고도 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던 불은 4년 뒤 다시 산을 오르다가 추락사했다.

▷“산과 싸운 사람들에게, 산은,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것이 산이 주는 보상이다. 산을 사랑하고 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산이 너무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산악인 프랜시스 영허즈번드 경은 수많은 산악인이 목숨을 걸고 다시 산으로 향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12일(현지 시간) 히말라야 등반 중 구르자히말에서 참변을 당한 김창호 대장의 심정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는 2013년 에베레스트에서 동료를 잃었지만 이후에도 히말라야로 향한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김 대장의 좌우명은 ‘집에서 집으로’였다. 집에 안전하게 돌아와야 비로소 성공한 등반이라는 뜻이다. 2004년엔 에베레스트에서 사망한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이듬해 원정대가 나선 적이 있다. “집에 가자!”고 외치며 얼어붙은 동료를 찾던 엄홍길은 그러나, 시신을 찾고도 한국의 집까지 옮길 순 없어 결국 산장(山葬)을 치렀다. 이 과정을 옮긴 영화 ‘히말라야’의 임일진 촬영감독도 이번에 목숨을 잃었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이라는 뜻의 ‘히마’와 집을 의미하는 ‘알라야’가 합쳐진 말이다. 눈이 사는 곳, 바로 ‘눈의 집’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눈의 집에서 마지막을 맞았다고 해서 김 대장과 원정대원들의 긴 잠이 편안할 것 같지 않다. 다행히 현지에서 시신 수습이 끝났다고 한다. 어서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 마지막 등반을 끝냈으면 한다.
 
주성원 논설위원 swon@donga.com
#고상돈#히말라야#김창호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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