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名문장]‘슬픔의 틈새’ 사할린을 보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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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 작가, 역사여행가
권기봉 작가, 역사여행가
《“역사를 기념한다는 것은 결국 역사를 바로 앎으로써 그를 통해 성찰하고 배운다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역사를 바로 볼 수 있게 안내할 ‘증언자’들의 존재 여부는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그들이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나서서 격려하고 지원하는 작업도 꼭 필요하다 할 것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어제보다 나은 오늘의 역사를 써내려갈 수 있고, 그것을 밑거름 삼아 내일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으리라.” ―최상구 ‘사할린’》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가 ‘슬픔의 틈새’라 부른 섬 사할린. 러시아 연해주와 일본 홋카이도 사이의 이 얼어붙은 섬은 1870년대 조선인의 이주가 시작된 이래 1983년 KAL기 격추 사건 등 한국 근현대사와 적잖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러나 그간 사할린은 실존하나 잊혀진 존재였다.

현재 한국은 사할린에서 연간 수요량의 6%에 이르는 천연가스를 수입하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석탄 광산으로 이름을 날렸던 섬이었다. 문제는 그 광산에서 일한 이들 중 상당수가 관의 모집이나 알선, 징용 등의 이름으로 끌려온 십수만의 조선인이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당한 뒤 ‘고려인’이라 불리는 연해주 조선인들과 구별돼 훗날 ‘사할린 한인’으로 불렸다.

그런데 이들 사할린 한인은 일제 때까지만 해도 일본 국적이었으나 광복 뒤 곧장 무국적자 신분이 된다. 이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일본이 국적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소련으로부터는 일본 스파이란 의심을 받아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박탈당한 채 버림받았다. 애초 한반도 남부에서 간 이들이 많다 보니 북한이 국적을 주려 할 때 선뜻 나서는 이들이 많지 않았고, 한국 정부도 오랜 기간 이들을 보듬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고, 한인 1세대 중 남은 이는 이제 겨우 1000명 남짓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한국 정부가 아예 두 손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0년 한소 수교 이후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그 대상을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할린으로 갔거나 그곳에서 태어난 이로 제한해 8월 16일 이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이를 비롯해 2, 3세의 자녀들은 원천 배제됐다. 힘없는 나라에서 태어난 원죄, 광복 뒤 조국에서 벌어진 전쟁과 가해자 일본의 무책임이 잉태한 희생자들에게 가해진 또 한 번의 비극이었다.

최상구가 쓴 르포르타주 ‘사할린’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 사할린 한인 문제의 원인과 해결과정을 정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동안 한국 사회가 등한시해 온 과제까지도 역사의식과 인권을 바탕으로 일목요연하게 풀어냈다. 특히 투박하지만 진솔한,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 문장으로 우리가 잊고 있던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는 더 나은 미래를 구상할 수 있게 해준다. 나아가 현지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 닿는 열정적이면서도 애정 어린 시선은 문장 너머의 맥락을 이해하게 해준다.

권기봉 작가, 역사여행가
#최상구#사할린#역사#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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