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배극인]한국, 조급하면 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2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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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산업부장
배극인 산업부장

중국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총 130편으로 구성돼 있는데, 백미는 사기열전 70편이다. 열전에서 중국인들이 가장 즐겨 읽는 부분은 제69편, ‘화식열전(貨殖列傳)’이라고 한다. 화는 재산, 식은 불어난다는 뜻으로 부를 축적해 제후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린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노하우를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무릇 사람들은 자신보다 열 배 부자면 그를 헐뜯고, 백 배 부자면 두려워하고, 천 배 부자면 그를 위해 일을 해주고 싶어 하고, 만 배 부자면 그의 노예가 되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사물의 이치다.’ 세상살이에 대한 중국식 세계관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말에 화식열전을 다시 꺼내 읽은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방중 홀대론 때문이었다. 사드 때문에 체면이 상한 시진핑 주석이 국내 정치용으로 한국을 홀대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보지만, 한국은 과연 중국과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으려는 건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현 정부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한다. 일부 유통기업을 중심으로 탈중국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지만 한국의 주력산업은 여전히 중국과 공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예컨대 문 대통령이 충칭 공장을 방문한 현대·기아자동차는 지난해 전체 생산량 788만 대 중 중국 생산량이 약 179만 대로 23% 수준이다. 국내에 이어 두 번째로 크고 미국(70만 대)보다 큰 시장이니 포기할 수 없다. 이미 중국에 따라잡힌 석유화학업계는 중국 기업들과의 협업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게임업계도 중국 버전 유통 승인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방중을 서두른 배경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경제 분야 관계를 복원한 성과는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런데도 중국이 이번에 보인 비례(非禮)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중국몽(中國夢)이라는 이름으로 중화질서 복원을 꿈꾸는 중국의 꿍꿍이가 겹쳐 보이는 데다 아직도 한국을 입맛대로 요리할 수 있는 상대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 단초를 그동안 우리가 제공해온 측면이 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조급증이 문제였다.

2014년 가을도 그랬다. 당시 중국만 믿고 역사 문제에서 한중 공조를 펼치던 박근혜 정부에 비상이 걸렸다.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방문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취임 후 처음 만나기로 한 것이다. 날짜는 11월 10일. 일본과의 만남을 외면하던 한국 정부의 입지가 상당히 불리해지는 상황이었다. 중국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고 정부는 뭔가 반전 카드가 필요했다.

10일 오전 8시, 2년 반을 끌어오던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팀이 실질적 협상 타결을 선언했다. 시 주석이 아베 총리를 만나기 3시간 50분 전이었다. 당시 정부는 13억 중국 시장이 열렸다고 홍보했지만 산업 관료들은 사석에서 노골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시한에 쫓겨 제대로 양보를 못 받아냈다는 것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급한 쪽이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한국은 정권마다 조급증을 떨치지 못하는 것 같다. 만만디(慢慢的·천천히)가 장기인 10년 정권을 상대로 5년 정권이 단기간에 성과를 내려다 보니 실수가 되풀이된다. 실수를 피하는 방법은 있다. 어떤 사안이든 정권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장기적 국익을 위한 것인지를 의사 결정의 준칙으로 삼으면 된다. 그런 다음 확신이 든다면 “중국의 의전에 목매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사대주의”라고 비판해도 된다. 그래야 하고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배극인 산업부장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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