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노지현]국정감사가 ‘인쇄업 부흥’으로 안 끝나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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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현 사회부 기자
노지현 사회부 기자
지난달 25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서울시 국정감사가 시작되자마자 야당 의원들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들은 의사진행 발언을 통해 “이렇게 자료 제출에 불성실한 경우는 처음 봤다”며 출석한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해 배석한 시 고위 간부들을 야단쳤다. “제때 자료를 주지 않는다”는 의원들의 성토가 한동안 이어졌다.

물론 피감기관인 서울시가 내놓기를 꺼리는 자료는 분명히 있다. 비리나 불법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서울시가 감추고 싶은 민낯을 드러내는 자료는 의원실이 달라고 해서 선뜻 내주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서울시가 모든 자료 제출에 미온적이었을까. 이번 국정감사에서 서울시를 감사하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와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모두 2435건의 자료를 요청했다. 시의 부서별로 최소 A4용지 1000장 분량 책자를 1권씩은 만들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니다. 매년 의원들이 요청하는 ‘단골 자료’는 데이터베이스로 남기면 좋겠지만 아직 이런 시스템은 없다. 주무관들이 매달려 문서를 작성하면 팀장 과장을 거쳐 국회에 자료를 보낸다.

당연히 막무가내 자료 요구도 있다. 한 국토교통위 의원실은 ‘경비원 실태현황 자료’를 요구했다. 담당 공무원이 “(서울시와 연관 있는) 서울주택도시공사에서 일하는 경비원 통계를 원하는 것이냐”고 묻자, “그냥 서울시 전체 아파트 경비원 관련 통계를 내놓으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최근 아파트 등 경비원 처우가 세간에 오르내리고 박 시장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공표하자 ‘혹시 뭐라도 있나 한번 보기나 하자’란 생각은 아니었을까 싶다.

국정감사는 3권 분립 정신을 바탕으로 헌법이 규정한 국회 고유 권한이다. 국가가 지방자치단체에 맡겨놓은 행정사무가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원들이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서울시가 서울시내 전체 아파트를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상식이다.

자료를 한껏 받아도 이틀간의 국정감사 동안 내실 있는 질의를 하기가 쉽지 않다. 전국공무원노조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시 국정감사에서는 의원들이 요구한 전체 자료 가운데 3%에 지나지 않는 205건에 대해서만 질의가 이뤄졌다. ‘일단 자료는 받아놓고 보자’는 식의 자료 요청이 많았다는 방증이다.

시의원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감이 끝나자마자 서울시의회 행정사무감사가 시작됐다. 15일까지 상임위원회별 감사를 벌인다. 2주 전부터 서울시는 국회에 보낸 자료와는 별도로 시의원들이 요청한 자료를 국실별로 인쇄해 책자로 만들어 시의원 105명에게 배포했다. 부서마다, 의원실마다 옛날 전화번호부처럼 두꺼운 자료집들이 쌓였다. 특정 부서가 말을 잘 듣지 않거나 이른바 민원을 잘 들어주지 않으면 “10년 치 통계를 모두 달라”며 ‘복수’하는 의원실도 있다고 한다.

시의원 중에는 분명 이 같은 자료를 통해 서울시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 만큼 정곡을 찌르는 질의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자료집은 곧 폐지로 사라질 것이다. 시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국정감사, 행정감사가 서울시 인쇄업 부흥에 큰 역할을 한다”는 비아냥거림이 나온다.

감사권은 법이 국민을 대신해 의원들에게 잘 쓰라고 위임한 검(劍)과 같다. 찔러도 찔린 사람이 하나도 아프지 않은,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검을 함부로 칼집에서 빼서는 안 된다. 종이 값도 국민 세금에서 나온다.
 
노지현 사회부 기자 isityou@donga.com
#국정감사#국회 고유 권한#종이값도 국민 세금에서 나온다#서울시가 감추고 싶은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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