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상훈]100조 원 ‘생색내기’로는 안 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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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경제부 차장
이상훈 경제부 차장
“서울에서 어떻게 애 키우며 살았나 몰라.”

며칠 전 만난 대학 동창 A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중앙부처 서기관 남편을 따라 세종특별자치시에 내려간 지 4년 만의 변화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서 어떻게 사느냐며 하소연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돈을 준다 해도 서울에선 안 산다”는 농담까지 할 여유가 생겼다.

그녀에게 서울은 무엇 하나 녹록하지 않은 곳이었다. 자신이 대기업 정규직이었고 남편은 행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이었지만 그런 명함은 육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맞벌이 수입으로는 내 집 마련은커녕 반전세 보증금도 벅찼다. 동네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려고 신청서를 냈다가 정원 40명에 대기자만 800명이 넘는다는 말에 풀이 죽어야 했다.

세종시에서는 모든 게 술술 풀렸다. 염원하던 내 집 장만은 공무원 특별공급분을 통해 해결했다. 두 아이의 보육은 인근 공립 어린이집 중 입소문이 좋은 곳을 선택해 해결했다. 국공립 어린이집을 고른다는 건 서울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출퇴근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게 됐지만 후회는 없다. 주거와 육아가 해결되니 외벌이로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이런 여유는 세종시에서 그녀만 누리는 특권은 아니었다. 그 결과 정부가 10년간 100조 원 가까이 쏟아붓고도 거두지 못했던 성과가 나타났다. 지난해 세종시 신생아 수(3300명)가 1년 새 21.8% 증가한 것이다. 세종시 합계출산율(1.82명)은 서울(0.94명)의 배에 육박한다. 애초 각광받던 직업 안정성(공무원)에 쾌적한 주거환경(특별분양 아파트), 양질의 보육시스템(국공립 유치원 비율 93%)이 갖춰지면서 나타난 변화다.

신생아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 세종시의 출산율 상승은 반가운 소식이다. 문제는 정부의 출산정책이 전국을 세종시화(化)하는 방식으로 추진된다는 점이다. “공공 일자리를 늘리면 청년실업과 저출산 모두 극복할 수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베이비부머의 자녀 세대가 취업해야 하는 2022년까지는 민간 일자리 확대가 요원하니 공공부문에서 소화하겠다는 게 골자다. 공공 일자리 티켓을 잡는 사람에게는 더없는 혜택이겠지만 이들에게 줄 임금과 연금이라는 짐은 국민 모두가 짊어져야 한다.

‘안정된 직장-쾌적한 내 집-양질의 보육’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새 정부는 조급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집값을 잡겠다며 서둘러 내놓은 8·2부동산대책은 수도권 분양시장을 자금력 있는 부자들만의 리그로 만들었다. 일자리의 질을 높이기 위해 추진되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두고는 공공기관조차 대통령의 지시를 어떻게 따라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다. 면밀한 검토 없이 정치권이 표심을 노리고 밀어붙인 무상보육은 보육시설 부실 운영과 아이들을 볼모로 한 국공립-사립 간 갈등만 키우고 있다. 난임 부부 병원비 지급부터 보육료 지원까지 수십 가지에 이르는 정부의 출산 지원책은 영유아 부모들에게 현금 얼마를 쥐여주는 것에만 집중돼 있다.

“10년간 100조 원을 넘게 썼는데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다그치기 전에 왜 돈 풀기로 저출산 문제가 풀리지 않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한다. 청년들은 자신의 ‘오늘’이 걱정돼 출산을 기피하는 게 아니다. 자신과 아이가 맞이할 미래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미래가 암담해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청년들에게 월 10만 원 아동수당을 보태준다며 생색낼 일이 아니다. 출산율 제고는 저출산 예산, 나아가 정부의 모든 정책이 아이 키우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 제로(0)베이스에서 효과를 분석하고 따져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세종시#8·2부동산대책#수도권 분양시장#무상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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