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다시 읽는 ‘2008헌마648’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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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국제부장
이진 국제부장
8월 말 짤막한 외신이 눈길을 잡았다. 손진두 씨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였다. 손 씨는 18세이던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있었다. 그해 8월 6일 히로시마 하늘에서 원자폭탄이 터졌다. 원폭은 ‘리틀 보이(Little Boy)’로 불렸다. 하지만 파괴력은 결코 꼬마가 아니었다. 인류가 그때까지 겪지 못했던 가공할 살상력이었다. 한국인 피폭자 7만여 명 중 3만여 명만 목숨을 건졌다. 손 씨와 살아남은 가족은 1951년 한국으로 쫓겨났다. 외국인 등록을 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손 씨에게 피폭 증상이 나타났다. 일본은 1957년 ‘원폭의료법’을 제정해 피폭자들을 치료했다. 하지만 일본에 사는 이들로 제한했다. 손 씨는 밀항을 감행했다. 치료를 받는 데 필요한 건강수첩을 내달라고 1972년 소송을 냈다. 6년이 지나서야 일본 최고재판소는 ‘원폭의료법은 내외국인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고 판결했다. 그때까지 손 씨는 국가에 기댈 수 없었다.

다른 피폭자 1세들은 손 씨보다 사정이 더 나빴다. 2만3000명 정도가 귀국했으나 국가는 따뜻한 손길을 건네지 않았다. 정부가 1965년 한일협정을 맺은 뒤 보상에 나섰을 때 원폭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징용 부상자들은 제외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원폭 후유증은 2세에게도 나타났다. 이를 세상에 알린 이는 김형률이었다. 어머니가 히로시마에서 피폭한 그는 날 때부터 기관지가 좋지 않았다. 커서도 감기만 걸려도 입원해야 했고 폐렴을 달고 살았다. 폐기능이 정상인의 20%에 불과했다.

김 씨는 왜 이리 아픈지 알 수 없었다. 25세가 돼서야 선천적으로 면역결핍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유전병이라는 깨침은 원폭 2세의 고통을 인권문제로 보는 눈을 뜨게 했다. 2002년 ‘원폭2세환우회’를 결성하고 도와 달라며 뛰어다녔다. 원폭 피해는 유전과는 관계없다는 벽에 부닥치고 몸도 버텨주지 않아 수차례 피를 토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며 사력을 다했지만 2005년 결국 35년의 생을 마감했다. 그때까지 국가는 그를 돌보지 않았다.

2700여 명으로 줄어든 고령의 1세들은 2008년 헌법소원을 냈다. 일본에 원폭 피해 배상을 청구했으나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고만 했다. 이들은 정부가 일본처럼 자국 피폭자를 돕지는 못해도 자신들을 대변해주길 바랐다. 한일협정에도 분쟁이 생겼을 때 정부가 나서는 절차가 있다. 하지만 정부는 피폭 뒤 60년이 넘도록 시간이 가기만 바라는 듯했다. 정부가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지켜주지 않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3년 뒤 헌법재판소는 정부의 ‘부작위’는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것도 ‘중대한 헌법상 기본권 침해’라고 지적했다. 1세들의 청구권 실현은 ‘무자비하고 불법적인 일본의 침략전쟁 과정에서 도구화되고 피폭 뒤에도 인간 이하의 극심한 차별을 받음으로써 침해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했다.

그렇지만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다. 정부가 배상 문제로 일본과 접촉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적십자사를 통해 최소한의 지원을 할 뿐이다. 19대 국회에 피폭자와 그 자녀를 돕거나 실태조사를 하자는 특별법안이 4건 발의돼 있다. 하지만 언제 통과될지는 알 수 없다. 17, 18대에서도 비슷한 법안이 발의되고는 그만이었다. 원폭피해자협회와 2세환우회 등이 2월에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특별법을 제발 통과시켜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유튜브로 다시 보니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한 맺힌 절규로 들렸다.

이진 국제부장 leej@donga.com
#일본#원자폭탄#원폭의료법#피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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