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고기정]박 동무와 버나드 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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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중국 베이징(北京) 북한식당에서 공연하는 ‘박 동무’의 팬이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러시아어로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른다. ‘곡을 갖고 논다’는 표현이 맞다. 기타 반주 하나로 청중의 감성을 사방에서 찔러댔다. 원곡을 부른 알라 푸가체바나 이를 번안해 부른 심수봉에 뒤질 바 아니었다. 처음 들었을 땐 정말 넋이 나갔다. 한국에서 출장 온 손님들도 그랬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K팝스타3’의 버나드 박에 대한 첫 느낌은 그저 그랬다. 분명 ‘박 동무’급 정도는 아니었다. 심사위원 평가대로 목소리는 헤비급인데 결정적인 뭔가가 없었다. 답답함도 느껴졌다. R&B 아니면 발라드만 고집해서다. “실망했다”는 일각의 혹평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하지만 이제 기자는 그의 팬이 됐다.

박 동무와 버나드 박에 대한 개인적 평가가 갈리게 된 건 둘이 놓인 조건이 비슷한 데서 출발한다. 박 동무는 본인의 희망과 북한 당국의 선택으로 외화벌이 일꾼이 됐다. 그의 행동은 철저히 상부의 통제를 받는다. 버나드 박도 자기의 의지로 K팝스타에 출전했지만 그 이후로는 시청률과 방송사 의도에 충실해야 한다. 오디션프로그램은 아마추어 신인 발굴이 목적이지만 그 자체로 매회 자기완결성을 갖추고 시청자를 흡인해야 하는 엄연한 쇼다.

박 동무는 미리 정해놓은 선곡에 따라 세밀하게 정돈된 기교로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백만 송이 장미’도 몇 번 듣다 보니 녹음기에서 나오는 듯했다. 물론 식당의 공연 단원에게 대학로 소극장의 가수들처럼 매번 뭔가 조금씩 다른, 살아 있는 음악을 기대하는 건 무리다. 하지만 사람이 기계처럼 느껴지자 처음의 감동이 허전함으로 남게 됐다.

버나드 박도 박 동무처럼 정해진 틀 안에 있는 듯했다. 다른 출전자들이 무대에서 춤까지 추며 변신을 거듭했던 것과 비교하면 지독한 고집이다. 쇼는 틀을 깨는 파격을 원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선택한 틀 안에 머물면서도 파격이 아닌 변화와 진보를 보여줬다. 미국 애틀랜타 출신으로 한국어가 서툰 그는 23일 상위 4명을 뽑는 무대에서 성시경의 ‘넌 감동이었어’를 불렀다. 김태우의 ‘하고 싶은 말’로 탈락 위기에 몰렸다가 마이클 부블레의 ‘홈(home)’으로 기사회생한 그였다. 중요한 무대였던 만큼 가요보다 팝을 고를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자신과 청중을 향해 돌직구를 던졌다. 스트라이크였다.

박 동무라고 해서 버나드 박이 보여준 변화와 진보를 해내지 못할까. 그녀가 5년 넘게 날마다 똑같은 ‘백만 송이 장미’를 부르는 건 거기까지만 허용돼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용납되지 않는다. 창의와 발전은 애초 기대하기 어렵다. 반면 버나드 박은 파격의 압력 속에서도 자신이 잘하는 영역에서 개선을 이뤄냈다. 가끔은 개혁보다 개선이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주재한 규제개혁회의가 생중계됐다.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사례들이 거론됐다. 규제를 철폐하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하라고 하니까 무조건 그 틀 안에서 규제 제거에 골몰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좋은 규제, 필요한 규제까지 함께 떠밀려 갈까 걱정스럽다. 규제가 풀린 저축은행들이 끝내 대형 사고를 친 게 3년 전 일이다. 박 동무처럼 아무 말 없이 주어진 과업을 이행하는 정부도 필요하지만 버나드 박처럼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우직하고 착실한 진보를 이뤄내는 정부도 필요하다. 지금이 그런 때다.

고기정 베이징 특파원 ko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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