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국회의 고장 난 두 자루 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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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녕 논설위원
이진녕 논설위원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고장 난 총을 들고 다닌다”고 빗대어 표현한 바 있다. 작년 어느 동료 국회의원의 출판기념회 자리에서다. 이 말을 받아 전병헌 민주당 원내대표는 “최 대표는 아직 고장 난 총인지 잘 모르고 있다. 고장 난 총이라도 가급적 총기 사용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대꾸했다. 서로 농처럼 주고받은 말이지만 의미는 가볍지 않다.

여당의 원내대표라면 정권을 대표해 야당을 상대로 ‘입법전쟁’을 선두 지휘하는 장수나 다름없다. 그런 사람이 고장 난 총을 차고 다니고, 그 사실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면 무슨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쩌랴. 총을 고장 낸 공범이 새누리당 자신인 것을. 그 덕에 여야가 툭하면 육탄전을 벌이는 ‘동물국회’의 모습이 사라진 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기능 부전의 ‘식물국회’가 대신하고, 다수결을 원칙으로 하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이 훼손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다수 의석을 가진 여당의 처지에서 보면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개정 국회법이 당장은 불편하겠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니 아직은 절망하기에 이르다. 법 개정의 취지대로 여야가 대화와 타협의 묘를 잘 살려나간다면 ‘다수 존중, 소수 배려’라는 새로운 정치문화를 창출할 수 있다. 만약 지금의 다수 여당이 소수 여당이나 소수 야당으로 전락할 경우엔 고장 난 총이 아니라 성능이 뛰어난 총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민주당도 만년 야당이 아니라 집권 여당을 꿈꾼다면 훗날을 위해 지금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를 보여야 한다.

사실 국회에는 고장 난 총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법제사법위원회의 월권이다. 고장 난 지 오래됐건만 도무지 개선될 조짐이 없으니 더 고질적이다. 얼마 전 박영선 법사위원장이 그 진면목을 다시 한 번 생생히 보여줬다. 여야 지도부가 처리를 합의했고, 관할 상임위에서 통과시킨 외국인투자촉진법안을 박 위원장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법사위 상정 자체를 거부했다. 그 바람에 국정 운영에 절대 필요한 새해 예산안마저 해를 넘겨 처리되는 불상사가 생겼다.

법사위가 월권을 자행할 수 있는 빌미는 ‘각 위원회에서 심사를 마친 모든 법률안은 본회의에 상정되기 전에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를 거치도록’ 한 국회법 제86조 때문이다. 이 규정에 따라 모든 법안은 반드시 법사위를 거쳐야만 본회의로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이 규정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규정은 2대 국회 때인 1951년 엄상섭 의원의 제안으로 신설됐다. 법률안의 위헌성과 다른 법률과의 충돌 여부 등을 심사함으로써 법률의 합헌성, 체계정당성, 조화성을 확보하자는 것이 그 취지였다.

하지만 13대 국회 때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이 되면서 여당이 독식하던 상임위원장 자리를 야당이 나눠 갖고, 15대 국회 후반부터 법사위원장 자리가 야당 몫으로 넘어가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법사위가 법안의 체계·자구 심사를 넘어 정책적 내용까지 간섭하며 내용을 임의로 바꾸거나 처리를 지연 또는 보류시켰다. 그렇게 해서 사장(死藏)된 법안이 한둘이 아니다. 북한인권법안도 그중 하나다.

법사위 소속의 한 의원은 “각 상임위가 대체로 이기적인 데다 무책임하게 법을 만드는 경향이 있어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외국 의회에선 그런 기능을 각 상임위나 별도의 기구에서 맡는다. 오죽 법사위의 횡포가 심했으면 이목희 의원 같은 야당 국회의원 12명이 앞장서 법사위의 체계·자구 심사 권한을 폐지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발의했겠는가. 고장 난 법사위의 기능을 바로잡는 것도 새 정치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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