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용관]아름다운 마무리가 보고 싶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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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관 정치부 차장
정용관 정치부 차장
남들보다 역사의식이 흐릿해서인지 몰라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결국 장남 재국 씨를 통해 추징금 1672억 원을 모두 납부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통쾌함이나 후련함보다는 씁쓸함이 밀려왔다.

16년 만의 법치(法治) 실현 등 이번 완납 발표의 정치적 역사적 의미를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는 5·18민주화운동의 직간접적인 피해자뿐만 아니라 1980년대를 대학가에서 최루탄 가스를 마시며 보낸 많은 이에게도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10·26사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군복을 입고 TV에 나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 결과를 발표하던 모습에 알지 못할 두려움을 느꼈던 게 엊그제 같고, ‘본인은’으로 시작하는 그의 권위적 육성이 지금도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그의 주변에선 “마음만 먹었으면 탱크를 동원해서라도 정권을 연장할 수 있었다”는 말도 나왔었다.

돈 씀씀이가 그를 승계한 다른 전직 대통령에 비해 훨씬 컸다고 하나 그가 걷은 수천억 원의 뇌물이 실제로 어디에 얼마나 쓰였는지, 또 남은 돈은 얼마나 가족이나 친인척 수중에 떨어졌는지, 해외에 은닉한 재산은 없는지 등 추징금 완납 발표에도 의혹은 말끔히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

늦게나마 추징금 환수가 이뤄지는 걸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뭔가 찜찜한 건 그가 연희동 집 거실에 홀로 앉아 두 눈을 부릅뜬 채 싸늘한 미소를 짓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자식들까지 겨냥하는 검찰 칼날에 두 손을 든 것일 뿐 속으론 “내가 권좌에 있을 때는 감히 얼굴도 못 들던 것들이…” 하며 분노를 삼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그의 납부 결정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사필귀정(事必歸正)이지만 권력의 관점에서 보면 한때 세상을 호령하다 이제는 힘없이 우리에 갇혀버린 ‘노쇠한 호랑이’의 말로(末路),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재국 씨가 “저희 자녀들은 부모님께서 반평생 거주하셨던 자택에서 여생도 사실 수 있길 바라고 있다”며 고개를 숙였을 때 마음 한편에서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든 것도 그 때문이리라. 전 전 대통령이 다른 사람들에겐 ‘문제적 인간’일지 몰라도 재국 씨에겐 어쨌든 하나뿐인 아버지이기에….

국민감정에 호소하려는 듯 전 전 대통령은 연희동 자택과 함께 경남 합천의 선산도 납부 재산 목록에 올려놓았다. 야당은 장기간 미납 과정에서 발생한 이자까지 환수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자 환수에 대해선 법적 논란이 많기도 하지만 돈 문제 갖고 더 왈가왈부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다.

사실 핵심은 돈이 아니다. 너무도 두꺼운 그의 얼굴이다. 여론에 밀려 2분짜리 대국민 사과 성명 하나 달랑 내놓고 “자 이제 됐나”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건 곤란하지 않은가. 필자가 6월 본란에서 ‘차라리 백담사로 돌아가라’는 칼럼을 썼던 것도 재산을 모두 압류하고 알몸으로 길거리에 나앉게 하라는 취지는 아니었다. 그가 연희동 집에서 여생을 보내든 합천으로 내려가든 백담사로 들어가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어디에서 여생을 보내든 만 82세의 그가 어떻게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인생을 성찰할 것인지, 그로 인해 피해를 봤을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주는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내려놓음은 일의 결과나 세상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어 자신의 순수 존재에 이르는 내면의 연금술이다”라고 법정 스님은 말했다. 이젠 ‘전두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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