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상근]박근혜의 치맛바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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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근 교육복지부장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필설(筆舌)의 전쟁. 백선엽 장군은 6·25전쟁 당시, 휴전회담의 성격을 자신의 자서전(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총과 칼이 아니라 붓(글)과 혀(말)로 하는 전쟁이었다는 얘기다. 어떤 일이 있었을까.

백 장군은 국군 1군단장으로 전선을 지휘하다가 회담에 들어갔다. 유엔군 대표단은 백 장군 외에 미 극동해군 사령관 터너 조이 중장(수석대표), 미 8군 참모부장 행크 호디스 소장, 미 극동공군 부사령관 로런스 크레이기, 미 극동해군 참모부장 알레이 버크 소장 등 5명이었다. 북한에서는 총참모장 남일 중장(수석대표), 이상조 장평산 소장, 중공군에서는 덩화(鄧華) 부사령관, 셰팡(解放) 참모장 겸 정치위원이 참석했다.

첫 회담은 1951년 7월 10일 열렸다. 어느 날, 백 장군의 맞은편 자리에 앉은 이상조 소장이 종이에 뭔가를 적어서 보여줬다고 한다.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 상갓집 개, 한자로 상가지구(喪家之狗)는 사기(史記)에 공자의 처지를 묘사하면서 나오는 말이다. 수척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얻어먹을 것만 찾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공식석상에서 상대방을 ‘개’라고 부르는 북한의 언어 품격은 정전 60주년이 되도록 변하지 않았다. 올해 북한에서 나온 발표문 몇 개를 보자.

‘남조선 괴뢰들이 가소로운 말장난질 따위로 우리의 존엄과 위력에 조금이라도 그늘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오판과 요행수가 어떤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가를 똑바로 각오해야 한다. 그때 가서 후회해야 아무 소용도 없으며 애당초 살아남아 후회할 놈도 없게 될 것이다.’(우리 민족끼리 논평·4월 12일)

‘대통령 권좌를 차지해보려고 부끄러울 정도로 치마 바람을 일쿠며 돌아치던 그날부터 오늘에 이르는 전 기간 요사스러운 언행과 황당한 궤변으로 우리를 심히 자극하며 대결광기를 부려온 박근혜이다…유신독재자가 무엇 때문에 총격을 당하여 비명횡사하였으며 대통령 바통을 넘겨준 리명박 역도가 무엇 때문에 숨을 쉬면서도 산송장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심각히 돌이켜보아야 한다.’(국방위원회 정책국 대변인 담화·5월 25일)

‘괴뢰보수패당이 우리의 아량과 관용을 악용하며 대화마당을 또 하나의 대결판으로 만들려 하고 있는데 대해 치솟는 격분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그러한 무뢰한들과는 더 이상 상종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조국평화통일위원회 담화·6월 13일)

‘외세의 힘을 빌어 우리를 무장해제시키고 반공화국 국제공조로 우리 체제를 변화시켜보겠다는 남조선 통치배들의 망상이야말로 자갈심어 감자 얻겠다는 것과 같은 허황한 개꿈이 아닐 수 없다.’(북한 노동신문·2013년 7월 9일)

괴뢰, 놈, 남조선의 박근혜, 역도, 무뢰한, 패당, 개꿈…. 국가 간에, 동족 간에 주고받을 만한 단어인가.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이 1일 정례브리핑에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는 언행을 자제하고 절제할 필요가 있다. 나름의 예의를 갖추고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비판했던 이유다.

국가 간의 정상회담이나 협상이 끝나면 ‘솔직한 의견을 교환했다’는 식의 발표가 나올 때가 있다. 현안에 대해서 속내를 털어놓거나, 격론을 벌이는 데 그쳤음을 외교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어찌 보면 얼굴을 붉혔을 법한 상황을 세련되게 알리는 셈이다. 예의와 품격은 국제사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민주당의 이해찬 상임고문이 “옛날 중앙정보부를 누가 만들었나. 박정희가 누구이고 누구한테 죽었나”라며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했다. 기사를 읽는데 위에서 언급한 북한 국방위원회 정책국의 대변인 담화가 떠올랐다. 섬뜩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송상근 교육복지부장 songmoon@donga.com
#북한#박근혜#언어#언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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