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문태준]힐링의 본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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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몸과 마음의 치유를 뜻하는 힐링의 열풍이 드세다. 출판계에는 힐링 관련 책이 쏟아지고, 힐링 드라마와 힐링 토크를 표방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등장에 대중의 눈길이 쏠리고 있다. 또 패션업계에서는 힐링의 유행으로 올해의 컬러를 그린으로 선정했다고도 한다.

힐링은 공감과 위로를 통해 자신을 긍정적으로 맑고 화창하게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탈이 없는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힐링은 명상과 상담 등을 통해 대체로 이뤄진다. 그런데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현실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이 세계는 그야말로 ‘고통의 바다’이다. 그것도 고통과 번뇌의 대해(大海)라고 하지 않던가. 너무 깊어서 헤아릴 수 없으므로 해(海)이고, 넓어서 끝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대(大)라고 하지 않던가.

한 시인은 ‘나는 나의 감정으로부터 분리되는 것 같다. 나는 나의 기쁨의 솜털을 모르며./나는 나의 고통의 소용돌이를 모르며’라고 썼는데, 이처럼 나뉘어 떨어지고, 안과 밖이 균열되고, 깨어지고 부서진 상태가 바로 요즘 우리 현대인들의 정신 상태라고 할 것이다. 이 압박된 정신을 정상적인 것으로 복원해 용서와 포용, 더불어 기뻐함, 다정함, 고결함, 평정, 자유, 신성, 사랑과 같은 가치가 가슴 가득 찰랑찰랑하게 충만하도록 하는 것이 말하자면 힐링일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힐링은 종교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종교가 궁극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진정한 정화에 있기도 한 까닭이다.

불교 경전에 부처와 순타(純陀)의 대화가 소개되어 있다. 부처가 순타에게 “누구의 정화의식이 마음에 드느냐”고 질문한다. 이에 순타는 “서쪽지방 브라흐민들의 정화의식이 마음에 든다”고 답한다. 브라흐민들은 “물병을 가지고 다니고, 물풀로 만든 화환을 걸고, 불을 예배하고, 물로 정화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한다. 그러나 부처는 “브라흐민들의 정화의식이 계율을 지킴으로써 얻게 되는 정화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부처는 거룩한 계율을 조목조목 언급한다.

부처는 남의 생명을 빼앗지 않는 것, 주지 않는 것을 가져가지 않는 것, 성적인 욕망으로 잘못된 행위를 하지 않는 것, 거짓말과 이간질과 악담과 잡담을 않는 것, 탐욕과 증오와 잘못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 등을 통해 스스로 정화된다고 말한다. 이러한 부처의 정화법은 업의 쌓임을 끊어서 영혼의 맑음을 얻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업, 번뇌와 같은 장애들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수행,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힐링이 목적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 세계적인 명상지도자 틱낫한 스님이 10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를 찾았다. 틱낫한 스님이 대중법문을 통해 강조한 힐링법도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마음에 화, 두려움, 미움이 거주하듯이 자애로움과 따뜻함 또한 상주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라는 것이었다. 나의 심신의 고통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는 것, 다른 사람들도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다 비워내고 바깥으로 쏟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등을 통해 우리들의 가슴에는 자애로움과 따뜻함이 새로이 생겨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종교적인 관점에서의 힐링은 요란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일(日日)의 매순간에 어떠한 악도 행하지 않는 제악막작(諸惡莫作)에 있다고 하겠다.

힐링은 자심(自心)의 사용과 연관되어 있다. 원효 스님은 “마음이 있으면 가지가지 만물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으면 가지가지 모든 만물조차 사라진다”라는 게송을 남겼고, 서산 대사는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본래부터 맑고 신령스러워/일찍이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음이라/이름도 붙일 수 없고, 모양도 얻을 수 없도다”라고 읊었다. 이러한 게송의 가르침은 우리들의 자심이 본래 청정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자심을 청정하게 잘 유지하면 힐링할 소이가 사라진다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한 경제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힐링산업은 태동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힐링 열풍은 식료와 여행, 건축 분야에서도 중요한 테마로 부상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치유 시스템이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힐링 열풍에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전국 여기저기에 힐링의 명소들이 아침저녁으로 시설되고 시장의 상품에 힐링 테마를 겉포장하고 있으니 힐링 열풍에 거품이 끼어 또 결국 ‘지나가는 사회적 유행’으로 그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마치 관광객의 발이 뜸해져 흉물이 되어가는 역사극 세트장처럼 되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다.

스스로 미래를 탄주하여 비탄에 머물지 않는 것, 그것이 힐링일 것이니 힐링산업은 이 일을 돕는 데에 역할이 있어야 할 것이다. 힐링의 본래 취지를 헤아려 이 대중적 관심을 보다 신중하게 사회적 치유 시스템으로 디자인하는 일에 지혜를 모을 때가 아닐까 한다.

문태준 시인
#힐링#사람과의 관계#종교적인 수행#힐링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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