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적(五賊)’…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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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21>오적

시 ‘오적’은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린 직후 다양한 유인물로 만들어져 배포되기도 했다. 오적 전문을 실은 이 책자에는 김지하가 시를 넘길 당시 ‘오적’ 5개 집단을 구체적으로 직접 그린 삽화도 함께 담겼다. 김지하 제공
시 ‘오적’은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린 직후 다양한 유인물로 만들어져 배포되기도 했다. 오적 전문을 실은 이 책자에는 김지하가 시를 넘길 당시 ‘오적’ 5개 집단을 구체적으로 직접 그린 삽화도 함께 담겼다. 김지하 제공
1970년 새해가 밝았지만 정국 상황은 날이 갈수록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3월 17일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승용차 안에서 고급 요정 마담이었던 정인숙(1945∼1970)이 권총으로 살해되어 변사체로 발견된 것. 함께 발견된 옷가방에서는 당대 저명인사 26명의 명단이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히는 정치적 사건으로까지 비화된다.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안된 4월 8일 오전 6시 40분에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중턱에 세워진 와우아파트 15동 콘크리트 5층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미처 잠에서 깨지도 못한 시민 33명이 숨지고 38명이 다쳤다.

당시 김현옥 시장은 9만여 채의 무허가건물을 철거해 거주자들을 경기 광주(현 성남시) 대단지에 이주시키고 나머지 가구들을 위해 시민아파트를 건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1969년 한 해에만 서울 32개 지구에 406동 1만5840가구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단기간에 짓다 보니 부실은 당연했다.

와우아파트도 여섯 달 만에 준공된 것이었다. 건설업자가 무면허였다는 것도 드러났고 뇌물을 주기 위해 공사비를 줄이려고 철근 70개를 넣어야 할 기둥에 5개만 넣었다는 것도 드러났다. 기둥도 시멘트 대신 모래를 넣은 모래기둥이었다. 와우아파트 사건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을 두고 ‘와우식 근대화’라는 말도 생겼다.

김지하는 이 즈음 ‘그의 운명’을 바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잡지 사상계 편집장 김승균으로부터 ‘동빙고동에 오적촌이라는 곳이 있다더라. 여기에 대한 장시(長詩)를 하나 써 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 김승균의 회고다.

“당시 사상계는 매달 테마를 정해 외부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사상계 사무실이 종로구 청진동 백조다방 건물 4층에 있었는데 야당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1970년 5월호를 5·16쿠데타 9주년 특집호로 내기로 하고 4월 기획회의를 하는데 당시 부촌(富村)이었던 동빙고동이 화제가 됐다. 혁명공약에서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고 한 (쿠데타) 세력이 오히려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실망과 비난이 드셌다.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달아 놓고 사는 ‘오적촌’이 있다는 소문이 시중에 파다하다는 거였다. 오적촌을 주제로 장시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해 김지하를 떠올렸다. 다들 찬성했다. 김지하는 대중에게 알려진 유명 인사는 아니었지만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특히 그런 시를 쓰려면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어야 했으니 그가 적격이었다. 나는 김지하에게 동빙고동 오적촌 이야기를 전하며 장시를 청탁했다. 그런데 5일 만에 300행이나 되는 긴 담시(譚詩·이야기 시)가 왔다. 그것도 삽화까지 그려서 말이다. 사흘 만에 썼다고 하기에 ‘역시 김지하’라고 생각했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내 어쩌다 붓끝이 험한 죄로 칠전에 끌려가/볼기를 맞은지도 하도 오래라 삭신이 근질근질/방정맞은 조동아리 손목댕이 오물오물 수물수물/뭐든 자꾸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으니, 에라 모르겄다/볼기가 확확 불이 나게 맞을 때는 맞더라도/내 별별 이상한 도둑 이야길 하나 쓰것다./옛날도 먼 옛날 상달 초사흗날 백두산 아래 나라선 뒷날(…).’(오적의 첫머리)

김지하는 재벌(財閥), 국회의원(國會議員), 고급공무원(高級公務員), 장성(將星), 장차관(長次官) 다섯을 나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에 빗대 ‘오적(五賊)’이라 칭했다. ‘정인숙 피살’을 정치적 사건으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을 고위 공직자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으로 묘사해 시사성을 살렸다.

김지하는 ‘오적’을 쓰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담시 같은 판소리 형태로 시를 써야겠다고 느낀 것은 대학생활 때부터 판소리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 조동일 심우성 등과 함께 ‘우리문화연구회’를 했는데 당시는 소수이긴 했지만 민요 판소리 탈춤 무속 같은 것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할 때였다. 마당굿을 하는 ‘말뚝’이라는 극회(劇會)도 만들었는데 연암의 ‘호질’ 같은 것을 각색해 공연하기도 했다.”

오적은 200자 원고지 40장 분량으로 사상계 18페이지에 걸쳐 실렸다. 김지하에게 “어떻게 그렇게 긴 시를 빨리 쓸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청탁받고 쓰기 시작했으니 쓰는 데만 한 사흘 걸렸다. 이렇게 말하면 다들 놀라거나 거짓말이라고 하는데 진짜 꼭 사흘 걸렸다. 돌이켜보면 사흘 동안 어떤 영적 흥분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고위 공직자들의 부패, 도둑질 방법, 호화판 저택의 내부 같은 것들은 전혀 본 적도 없고 고작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 몇 개를 들은 것뿐이었는데 막상 시를 쓰려고 앉으니 단박에 떠올랐다. 시를 쓰면서 긴장, 피로, 권태감을 느꼈다거나 착상 변경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도 아무리 이성적으로 따져보아야 알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신명’이라고 생각한다. 신명이 내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다시 김승균의 말이다.

“‘오적’ 원고를 받아들고 걱정도 없지 않았다. 사상계가 광고 탄압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오적’이 나가면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원고를 받자마자 사장실 책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고 나왔다. 돌아와 보니 부완혁 사장(사상계 2대 사장)이 껄껄 웃어가며 읽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괜찮겠죠” 하면서 OK 사인을 해 주었다. 어려운 한자가 많아 활자를 새로 만드느라 편집이 늦어져 사상계는 4월 말에야 출간됐다. 책은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초판 3000부가 삽시간에 매진됐고 재판(再版) 요구가 빗발쳤다. 요샛말로 대박이 난 거였다. 정부에서도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었다.”

오적 필화 사건은 5월 중순 국회에서 신민당 의원이 대정부 비판 발언을 하며 시 ‘오적’을 낭독하는 일이 있었고, 이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상계를 가져오라 해서 읽고는 “이게 애국이야?” 하며 집어던졌다는 이야기가 돌 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 같았다. 마침 1970년 국제펜클럽 서울대회를 앞두고 있었던 터여서 문제삼을 경우 국제적으로 시인을 탄압하는 국가라는 망신살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서 터졌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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