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상훈]국민연금, 죽어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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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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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국민연금공단의 한 지사. 막무가내의 사내가 뭔가 항의 중이다. 과장된 미소의 여직원. “국민연금은 은퇴자의 노후생활을 도와주는 선진 시스템인 거 아시죠?”

사내는 콧방귀를 뀐다. “그건 개인이 알아서 할 일이고. 왜 국가가 관여해?”

다시 여직원의 과장된 멘트. “노인이 돼서 비참하게 죽고 싶은 건 아니시죠?”

사내가 보험료 고지서를 집어던진다. “협박하는 거야? 제멋대로 정해놓고 국민의 의무? 좋아. 나, 오늘부로 국민 안 해!”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남쪽으로 튀어’의 한 장면이다. 영화만 보면, 국민연금을 싫어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듯하다. 사실 국민연금만큼 출범(1988년)할 때부터 폐지 논란에 휩싸인 제도는 흔치 않다. 보험료를 내는 시점과 연금을 받는 시점 사이에 20∼40년의 격차가 생기는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2060년 기금이 고갈된다니 불안할 수밖에 없다. ‘보험료만 내고 연금은 못 받는 것 아냐?’ 이런 걱정은 충분히 ‘인간적’이다.

2004년에도 그랬다. 인터넷을 통해 ‘국민연금 8대 비밀’이 확산됐다. 이 제도가 얼마나 허술하고 주먹구구식이며 오류가 많은지를 조목조목 따지는 괴담이었다. 시민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급기야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 거부 운동이 시작됐다.

8대 비밀이 완전 낭설은 아니었다. ‘소득이 한 푼이라도 있으면 국민연금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당시만 해도 보험료를 모두 냈어도 소득이 있거나 사업자등록을 하면 연금을 받지 못했다.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가 유족연금을 받지 못한다’는 항목도 일정 부분 맞는 얘기였다.

아내와 남편이 각각 국민연금을 받았다 치자. 그러다 남편이 사망했다. 아내는 이미 연금을 받고 있기에 남편의 연금을 받을 수 없다. 두 개의 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 남편의 연금을 받으려면 아내는 자신이 받던 연금을 포기해야 한다. 둘 중 하나만 선택하란 얘기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에 불합리한 제도는 상당히 개선됐다. 8대 비밀 파문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봐야 할까.

요즘엔 부부가 모두 국민연금을 받다가 한 명이 사망해도 유족연금이 지급된다. 다만 20% 정도만 준다. 비율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개선된 것만큼은 분명하다.

소득이 있으면 연금을 못 받던 불합리한 제도도 고쳐 월 소득이 189만 원 미만이면 국민연금을 전액 지급한다. 189만 원을 넘을 경우에도 소득 수준에 따라 연금액을 할인해 지급한다.

그래도 국민연금 불만 세력은 여전히 많다. 최근 한국납세자연맹이 국민연금 폐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신(新) 8대 비밀’이 다시 등장했다.

연맹은 “국민연금이 폐지되지 않으면 국가 부도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중에 연금을 받더라도 대폭 삭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기금이 고갈돼도 정부가 연금을 지급한다’는 약속도 지켜지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보건복지부나 국민연금공단은 이 주장이 터무니없다며 별 대응을 하지 않는 분위기다.

만일 정부가 연맹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민연금을 폐지한다 치자. 그때의 쇼크는 상상하기조차 두렵다. 당장 연금으로 생활해야 할 노인은 어쩔 것이며 이미 납입된 보험료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주요 사회안전망이 사라졌으니 무엇으로 그것을 대체할 것인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자. 막무가내의 사내는 “한국에 산다고 해서 한국 국민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에 관해서라면 이 말은 틀렸다. 직장이 있거나 자영업을 하는 한국 국민이라면 국민연금에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기금 고갈 시점까지는 아직도 47년이나 남았다. 부족한 점은 채우고, 엉성한 점은 메우며, 불합리한 점은 개선하면 된다. 그게 순리다. 몇 번을 생각해 봐도 폐지 운동은 적절하지 않다.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국민연금#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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