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염재호]21세기 유목민 노동자와 지식충전 시스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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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호 객원논설위원·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염재호 객원논설위원·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양떼들이 꼬물꼬물 목장으로 들어가는 모습과 노동자들이 꾸역꾸역 공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는 시작한다. 주인공 채플린은 20세기 초 공장에서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를 조이는 단순 노동자다. 이 영화는 20세기 들어서 효율성 극대화를 추구하는 대규모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현대인의 애환을 그린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변화하는 문명사의 대전환은 노동의 성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노동의 분업과 전문화가 대량생산 체제를 만들고 대규모 공장과 대기업의 등장을 불렀다. 20세기 초 인류역사의 대전환기에서 노동의 변화에 재빠르게 적응한 개인이나 기업, 국가는 그 효율성 때문에 성공의 길을 걷지만 그러지 못한 개인이나 조직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21세기 초 문명의 전환이 또다시 시작됐다. 20세기 말 컴퓨터 혁명으로 일부 산업을 제외하고는 대기업 조직의 대량생산 체제가 다품종 소량생산과 생산 공정의 자동화 등으로 신속하게 해체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 중심으로 벤처기업들이 빠르게 등장했다 사라지면서 노동의 유목민적 특성이 드러났다. 한곳에 오래 정주하면서 생활하기보다는 블루오션을 찾아 끊임없이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이 21세기의 새로운 산업과 노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기에 대기업은 끊임없이 위기를 강조하고 변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치면서 구조조정과 연구개발(R&D)투자에 매달리게 된다. 20세기식 관료제 조직과 생산양식은 뒤쫓아 오는 경쟁자에 의해 쉽게 모방되고 기존의 효율성은 쉽게 비효율로 전락한다. 따라서 21세기에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기술을 생산해내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변화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주지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도 심화한다. 끝없는 경쟁과 급속한 변화는 불확실성을 증폭하고 불안감을 가중한다. 미래에 대해 대기업도 불안해하고 노동조합도 불안해하고 대졸 취업자들도 불안해한다. 불안은 불신을 낳고 불신은 불만을 낳는다. 국가와 사회가 새로운 생산시스템과 노동의 변화에 걸맞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니까 대학생들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안정성만을 추구하게 된다. 아무리 스펙이 좋고 명문대를 나와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려 하지 않는다. 각종 자격증을 얻고 스펙을 쌓기 위해 엄청난 사교육비를 투자하고, 로스쿨 등 전문대학원에 진학하고, 재수 삼수를 해서라도 대기업 취업에 매달린다. 대기업 선호로 인한 청년실업과 취업재수 문제는 우리 사회 취업의 심각한 불일치로 연결된다. 21세기 산업구조는 창의성을 우선시하는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는데 우리 졸업생들은 안정적인 대기업만 선호하기 때문이다.

대기업 취업만 노리는 대학생들을 보면 안타깝다. 대기업에 고용창출을 강요해 청년실업 문제를 풀려는 정부의 정책도 안타깝다. 비정규직 철폐 등 고용의 안정성만을 강조하는 노조의 주장도 아쉽다. 21세기 생산양식과 노동의 변화는 이미 시작됐는데 20세기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니 문제가 잘 풀릴 리 없다.

대학생들이 대기업을 선호하는 이유가 직업의 안정성, 높은 급료, 사회적 인식 등이란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중소기업으로 이들을 유도하기 위한 획기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중소기업을 중시하고 우리 사회를 창조적인 사회로 재구성하려면 새로운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창의적인 중소기업에 취업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창업을 하고 싶지만 벤처기업은 실패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중소기업 취업을 망설인다면 이런 기업에 취업한 다음 발생할 실패를 보완해주는 사회 보장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벤처기업이나 중소기업에 취업했다가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대학으로 돌아와 새로운 지식을 재충전하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프로축구에서 1부 리그와 2부 리그를 운영하는 시스템처럼 말이다. 예컨대 주요 대학에 만 명 정도의 중소기업 취업 회귀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피난처 시스템을 만들면 안정적 새로운 일자리 만 개를 창출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도전정신을 갖고 중소기업에 취업했다가 한계를 느끼면 언제든지 대학으로 돌아와 지식을 재충전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으면 조지프 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를 통한 이노베이션 창출에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 정부가 그리 큰 예산 지원 없이 대학과 기업이 협력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할 수 있는 재충전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면 창조적 지식과 혁신적 생산이 함께 어우러지는 새로운 사회보장시스템이 될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21세기에 20세기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서는 안 된다. 미래의 변화를 읽고 사회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스템 설계가 박근혜 정부가 구상하는 미래창조과학부에서 많이 기획됐으면 좋겠다.

염재호 객원논설위원·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jaehoyeom@icloud.com
#유목민 노동자#지식충전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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