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중현]카르페 디엠, 우비 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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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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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현 경제부 차장
박중현 경제부 차장
마지막 세계대전은 핵(核)이 아닌 생물학 전쟁이었다. 상대국이 쏴댄 ‘대량 살상용 생물학 포자 미사일’은 미국에 사는 20∼60세 인구의 목숨만 골라서 앗아갔다.

전쟁이 끝난 후 1년. 60세가 넘는 노인들은 첨단기술의 도움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건강을 유지한다. 이들의 경쟁자는 19세 이하 미성년 청년들뿐. ‘엔더(ender)’라 불리는 노인층이 장악한 의회는 ‘스타터(starter)’로 호칭되는 청년들 때문에 노인이 일터에서 밀려나지 않도록 ‘연장자 고용 보호법’을 통과시킨다. 미성년자의 취업을 완전히 금지한 것이다. 부모를 잃은 미성년 청소년들은 폐허가 된 도심에서 들쥐처럼 숨어 산다. 부유층 노인들은 오래 사는 것으로도 부족해 미성년자를 유인, 공급하는 불법업체에 큰돈을 내고 자기 정신을 청년의 몸에 옮겨 젊음까지 누리려 한다.

지금 와서 보면 지난해 4월 이런 내용의 소설 ‘스타터스’가 공상과학(SF)소설로 드물게 베스트셀러가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20, 30대와 50세 이상의 투표 성향이 확연히 갈렸던 보름 전 대선 이후 일부 청년들은 “이 소설이 현실이 됐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장년층 이상에 대한 젊은층의 감정이 선거에 앞서 책 판매에 영향을 미쳤던 셈이다.

자기 세대의 기대를 섞어 다수가 표를 던진 후보가 패배한 데 대한 청년층의 푸념은 이유가 있다. 한국 사회는 소설 속 현실과 여러모로 닮았다. 우선 한국인의 수명이 지금처럼 긴 적은 없었다. 생물학 미사일이 터지지 않았어도 투표 경쟁에서 승리할 만큼 50대 이상은 인구에서 우위에 있다.

고도 성장기를 살아온 50대 이상은 부도 많이 축적했다. 역사상 이들처럼 당대에 재산이 불어난 세대는 어느 때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위기라는 글로벌 금융위기, 유럽 재정위기가 닥쳤다. 청년층을 위한 괜찮은 일자리는 태부족이다. 부모 세대가 일궈낸 부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기성세대에 불만이 큰 게 당연하다.

모든 게 소설과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청년들이 몇십 년이 지나 이해하게 될 다른 부분이 있다. 50대 이상의 다수가 표를 던진 속마음이다. 이들은 복지 확대, 경제민주화를 엇비슷하게 외치는 두 후보 중 상대적으로 당장의 복지 확대를 적게 약속한 쪽, 경제성장을 조금 더 중시하는 편에 표를 던졌다.

이들은 경험을 토대로 미래에 투표했다. 성장이 준 일자리, 그로써 지켜낸 가정, 못 배운 한을 풀 만큼 자녀를 교육시킨 기회. 그 의미를 잊지 않았다. 요구하고, 누리고 싶어도 때로 억눌리고, 참으며 지낸 긴 시간이 만든 것들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도 있었다.

20여 년 전 대학의 그리스 희곡 강의 첫 수업에서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고전문학의 주제는 단 두 개로 압축된다. 하나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 또 하나는 우비 순트(Ubi sunt)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온 것처럼 카르페 디엠은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다. 우비 순트는 ‘우리 앞에 있던 그들은 어디에 있나(Ubi sunt qui ante nos fuerunt)?’의 앞 단어로 과거에 대한 회상, 회한을 의미한다. 당장 복지 확대를 원하는 세대와 경험을 통해 성장을 중시하는 세대가 맞붙은 이번 선거는 카르페 디엠과 우비 순트의 충돌이었다.

이번 승자는 과거를 기억하는 세대였다. 하지만 노인의 어제가 청년이요, 청년의 내일이 노인이다. 시간은 미래를 향해서만 흐르기에 ‘스타터’와 ‘엔더’의 싸움에서 언젠간 스타터가 이기게 마련이다. 청년들은 장년이 된 뒤 비로소 깨달을지 모른다. 부모 세대가 누구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카르페 디엠#우비 순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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