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하태원]특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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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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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사(特使) 외교의 묘미는 기존 외교 채널로는 풀어낼 수 없는 난제를 단숨에 정치적으로 타결해 내는 파괴력에 있다. 미국과 중국의 국교 정상화를 이끌어내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1971년 헨리 키신저의 특사 외교가 대표적이다. 그의 첫 번째 중국 방문은 파키스탄을 통한 밀행(密行)이었다. 미국은 중-소 분쟁의 틈바구니를 교묘하게 이용해 미중 화해무드를 조성한다는 특수 임무가 공개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과거 남북 관계에서는 밀사(密使)가 불문율이었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성사시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청산가리를 손에 쥔 채 비밀리에 판문점을 넘었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1980년대 후반 20여 차례 북한을 오갔던 박철언 대통령정책보좌관은 훗날 “평양에 갈 때마다 유서(遺書)를 쓰고 갔다”고 털어놓았다. 서동권 국가안전기획부장은 1990년 9월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동시에 회동하는 기록을 남겼고, 2000년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거액을 북한에 건넨 덕분인지 첫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시켰다.

▷특사 외교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취임 이후 대북(對北) 강경 노선을 견지하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차관보를 특사로 보내 북한과의 대화를 끌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북한은 되레 우라늄 농축 사실을 시인하며 북-미 관계를 파탄으로 몰고 갔다. 다급해진 김대중(DJ) 정부가 2003년 1월 서둘러 보낸 특사도 실패로 끝났다. DJ 특사이자 사실상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의 특사였던 임동원 대통령외교안보특보는 이종석 대통령직인수위원을 대동하고 사흘간 평양에 머물렀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이들을 만나주지 않았다.

▷내년 2월 취임하는 박근혜 당선인으로서는 버락 오바마 2기 정부를 맞는 미국은 물론이고 새롭게 정권이 출범한 중국, 일본 등과 외교 관계를 순조롭게 재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권력교체기라는 공통점이 있는 만큼 박 당선인의 의중을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특사를 통해 첫 단추를 단단히 끼워야 한다. 다만 4강 특사를 파견하기 식의 ‘루틴’보다는 현안의 우선순위와 전략적 목표에 대한 분석을 먼저 하는 것이 필수다. 취임도 하기 전에 박 당선인에게 불쑥 특사 파견을 제안했다가 사실상 ‘퇴짜’를 맞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모습은 왠지 조급해 보인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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