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한일 불신 스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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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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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경제부장
천광암 경제부장
국제 외환시장은 정글이고 전쟁터다. 수출업체와 수입업체가 무역을 위해 외환을 사고파는 곳이라는 설명은 현실이 아닌 교과서 속 이야기다. 외환시장에서 무역대금 결제를 위해 거래되는 외환은 3%에도 못 미친다. 외환시장을 활보하는 주역들은 헤지펀드 같은 금융투기 세력들이다. 이들은 웬만한 나라의 중앙은행쯤은 ‘찜 쪄’ 먹을 수 있는 자금 동원력과 초고성능 컴퓨터 시스템으로 무장했으며, 젊은 수학천재들을 직원으로 거느리고 있다.

전 세계 외환시장에서 거래되는 자금은 하루에 2조 달러를 웃돈다. 지난해 우리나라 연간 총수출액의 3.6배, 현재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의 6.2배에 이르는 규모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외환보유액을 많이 쌓는다고 해도 외환시장에서는 ‘안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투기세력의 공세에 덜 흔들리려면 되도록 많은 나라의 외환당국과 끈끈한 동맹관계를 맺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일 통화스와프 570억 달러의 만기가 연장되지 않은 것은 한국에 큰 손실이다. 지금은 미국과 유럽이 돈줄을 거의 무제한으로 풀고 있어서 오히려 과다한 외화 유입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라 당장 문제가 될 가능성은 작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해지거나 국제 경제 흐름이 바뀌어 외화가 유출되는 상황이 왔을 때 570억 달러는 천당과 지옥을 가를 수도 있는 돈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요청하면 통화스와프를 연장하겠다”며 거드름을 피우는 일본에 머리를 숙이면서 연장을 사정해야 했을까?

일본에는 ‘모리의 빈 벤토(도시락)’라는 고사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死後) 일본의 권력질서를 결정한 세키가하라 대(大)결전이 고사의 무대다. 당시 세키가하라에는 두 패로 갈린 일본 전역의 호족들이 총출동해서 패권을 겨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東軍)과 이시다 미쓰나리가 이끄는 서군(西軍)의 총병력은 각각 8만 명 안팎. 병력 수에서는 어느 쪽도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지리적 요충을 선점한 서군이 전체적으로 보면 유리한 판세였다고 한다.

그러나 승리는 도쿠가와의 동군에 돌아갔다. 서군이 왜 패했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앞서 말한 ‘모리의 빈 벤토’도 서군의 주된 패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서군의 주력에는 도요토미의 핵심 측근이었던 모리 가문의 병력도 포함돼 있었다. 모리군(軍)은 세키가하라 결전에서 도쿠가와의 배후를 치는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전투가 시작된 이후에도 형세를 관망할 뿐 병마를 움직이지 않았다. 애가 탄 서군의 호족들은 거듭 출전을 재촉했지만 모리군의 대장은 “지금은 병사들에게 벤토를 먹이는 중”이라는 궁한 변명을 하면서 서군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지켜봤다고 전해진다.

만약 이번에 한국 정부가 일본에 통사정을 해서 한일 통화스와프를 연장했다면 언젠가 세키가하라의 서군처럼 ‘모리의 빈 벤토’에 뒤통수를 맞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 근거는 이렇다.

우선 일본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한국의 지원 요청을 싸늘하게 거절한 전례가 있다. 자국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뿐 한국 경제의 안정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둘째, 일본의 국수주의 움직임 확산과 함께 독도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매년 고조되고 있다. ‘한일 통화스와프 중단’을 국내 정치용 포퓰리즘 카드로 쓰고 싶은 일본 정치인들의 유혹도 이에 비례해서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이 ‘해가 쨍쨍할 때 우산 뺏긴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는 식의 위안에 빠져 있을 여유는 없다. 한일 통화스와프의 공백을 보완할 대안을 찾지 않으면 비 오는 날 모리의 군문 앞에 다시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벤토는 다 드셨나요.”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
#한일 스와프#외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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