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천광암]울고 싶은 대학 4년생,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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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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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광암 경제부장
천광암 경제부장
고도성장을 지속한 한국경제의 궤적에서 대졸 취업난이 사뭇 심각해진 것은 1990년대 중반쯤으로 기억된다. 1996년 10월 아직 올챙이티를 벗지 못한 기자는 서울에서 열린 한 취업박람회장을 찾았다. 박람회장 입구에 유독 지친 표정의 대학생 한 명이 보였다. 강릉대 전자공학과 4학년생 C였다. C는 나흘간 박람회장 2곳을 돌면서 지원서 20장을 받았다고 했다. 1장에 1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기 때문에 녹초가 됐지만, 그래도 “채용박람회가 좋다”고 했다. 적어도 지방대생이라는 이유로 원서조차 못 받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C의 분투기는 ‘울고 싶은 대학 4년생’이라는 제목으로 그해 10월 25일자 동아일보 1면에 큼지막하게 실렸다. 대형 권력비리사건이 줄을 이었고, 이런 종류의 연성(軟性)기사를 1면에 올리는 것 자체가 별로 흔치 않던 시절이다. 그런데도 1면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파격적으로 C의 고생담이 소개된 것은, 앞서 이야기한 대로 이 무렵부터 대졸 일자리 문제가 한층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경제는 외환위기를 겪는 등 굴곡도 있었지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국내총생산(원화 기준)은 2.7배로 늘었다. 산업분야에서는 삼성전자가 소니와 노키아를 누르고, 현대자동차가 닛산과 혼다를 제치는 기적 같은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청년 일자리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심하게 나빠졌다. C는 비록 힘든 과정을 거쳤지만 졸업장을 손에 쥐기 전에 국내 양대 전자대기업 중 한 곳에 정규직으로 취업했다(지금도 이 회사에서 간부로 일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요즘은 4년 만에 졸업을 하고 유수의 대기업에 취업한다는 것은 제한된 소수만 누릴 수 있는 사치다. 취업에 필요한 스펙을 쌓기 위해서는 1년 안팎의 어학연수나 인턴근무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청년실업은 ‘이태백’ 등의 유행어를 낳는 수준을 넘어 세대문제로 비화했다. 이른바 ‘88만원 세대’(최저임금 수준의 비정규직 일자리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뜻)의 등장이다.

특히 대졸 취업난은 최근 들어 경기에 상관없이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기관 졸업자의 취업률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 2009년 각각 76.7%와 76.4%를 나타냈지만, 오히려 그 여진에서 벗어난 2010년 이후에는 50%대에서 맴돌고 있다. 대졸 취업난은 이제 경기 문제를 넘어 구조적인 문제가 됐다는 의미다. 이런 가운데 국제노동기구(ILO)는 최근 ‘절망적인 청년노동시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앞으로 5년간 청년실업이 각국 정부를 괴롭히는 심각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런데 앞으로 5년 동안 한국경제를 책임질 여야의 대권후보들은 어떤가. 제대로 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고사하고,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기본인식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

‘88만원 세대’라는 신조어를 처음 만들어 낸 동명(同名)의 단행본은 20대를 향해 “토플 책을 덮고 짱돌(상징적인 의미)을 들라”고 촉구한다. 20대들은 “가진 돈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통해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쁜 우리에게 짱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20대의 손에는 ‘신성한 한 표’라는 이름의 짱돌 660만 개가 쥐어져 있다. 20대여, 지금이야말로 여야 대선후보들을 향해 짱돌을 들 때다. 혜택은 기성세대가 보고, 비용은 20대가 치러야 하는 복지포퓰리즘 공약의 남발을 중단시켜야 한다. 그리고 무슨 산업을 어떻게 키워서, 몇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낼지 대선후보들이 진지하게 고민해서 답하게 만들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일까지는 앞으로 100일. 이 시간이 지나면 ILO가 경고하는 암울한 5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천광암 경제부장 iam@donga.com
#한국경제#대졸 취업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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