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주의 ‘삶과 죽음 이야기’]<3>암을 이긴 사람들 100만 명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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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열정이 보인다. 자신과 똑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을 보면 스스로 구원의 손길을 뻗쳐 따뜻한 곳으로 안내하려고 하는 것이다. 암 환자들의 이 유별난 심리는 곳곳에서 나타난다. 치료기간이 끝난 후 5년 동안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아 ‘생존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늘 나를 놀라게 한다.

이화여대 목동병원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은 김옥수 씨(49)는 4년 전 사선(死線)을 넘었다. 인생이 끝났다며 눈물 흘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그가 걷기 시작한 제2의 인생은 다른 환자들을 돕는 봉사의 길이었다.

같은 병원에서 역시 유방암 치료를 받은 백주현 씨(50)도 그와 동행했다. ‘나를 좀 어떻게 해주세요’라고 호소하는 듯한 암 환자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몸 안에서 뭔가 끓어오른다고 한다. “도와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이라면서 말이다. 그는 다른 암 환자들을 찾아가 죽음의 두려움, 투병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친구가 되고 자질구레한 불편사항도 해결해주는 상담사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대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고 봉사활동에 나선 이정순 씨(69)는 림프암을 앓고 있는 젊은 남자 환자를 재기시킨 것을 여생의 보람으로 삼는다. “이렇게 나이를 먹었어도 다른 환자를 도울 수 있다는 건 축복입니다. 내 투병 경험을 거울삼아 다른 암 환자의 건강을 관리해주고 코칭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 대견하게 느껴져요.”

중소기업 간부였던 김상곤 씨(68)는 위암을 극복했고, 여성 의류점을 경영하는 유선주 씨(55)는 유방암을 털고 일어났다. 두 사람도 서울아산병원에서 자원봉사활동을 한다.

‘인생이 끝났다’며 삶을 포기했던 암 환자는 수도 없이 많다. 이 중 생존자 대열에 서 있는 사람들은 전국적으로 100여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일부가 현재 투병 중인 환자들에게 스스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이들은 내게 자신의 이름도, 과거의 병력을 밝혀도 좋다고 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보면 이승의 다툼이나 저승의 두려움도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는지 이들은 전혀 모르는 이웃 환자를 돕는 데서 생활의 활력을 느낀다. 자신감 넘치는 생사관을 지녔다.

2년 전부터 생존자들에게 다른 암 환자를 도울 수 있는 기본 교육 프로그램을 짜서 진행해온 주인공은 서울대병원 암병원 통합의료센터 윤영호 교수이다.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장윤정 박사도 돕고 있다.

스스로 생존자라고 부르는 봉사자들은 서울과 지방의 주요 병원에서 추천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엄격한 심사절차를 거쳐 워크숍에 참석하고 전화상담 방법 및 건강 코칭 교육을 받은 후 다른 암 환자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건강 파트너’ 수료증을 받는다. 윤 교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성공한 암 환자들의 습관이 무엇인지를 치밀하게 연구하고 있다.

나는 지난가을에 이들의 수료식을 지켜본 적이 있다. 눈물과 환희의 현장이었다.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를 안고 있는 환자들을 도울 자격을 얻었다는 데서 오는 긍지와 희열이 넘쳤다.

수료자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가족과 동료들이 보내는 박수가 요란했고 여기저기서 오래도록 포옹이 이어졌다. 한때 사선에서 피눈물을 쏟았던 사람들의 감정은 보통 사람의 그것보다 몇 배 증폭된다.

내빈 속에 끼어 있던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눈시울도 젖어 있는 것을 그때 보았다. 그의 남편도 암 투병 중이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재산이 많거나 적거나 삶의 어느 순간 우리는 생과 사의 경계선에 서게 된다. 오직 자신만이 예외라고 생각하거나 잊어버릴 뿐이다.

시간이 흘러도 ‘건강 파트너’ 봉사자들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지난주 그들의 1차 활동이 끝난 것을 자축하는 모임에서는 계속 교육받고 봉사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희망자가 대부분이었다. 너도나도 어린이들처럼 손을 높이 쳐들었다.

생존자들과 암 환자들 사이에 만들어진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공감대가 그들의 봉사정신에 불을 지폈던 같다. 그것이 암으로부터 해방된 자와 지금 암에 속박된 자 양쪽의 삶의 질을 높여주었음에 틀림없다. 세상의 희망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한번 사선을 넘은 생존자들은 다음에 경험할지 모르는 또 다른 사선을 준비하면서 남을 도우며 열심히 살 것이다.

최철주 칼럼니스트
최철주 칼럼니스트
그러나 그들의 활동도 중단될 위기에 빠졌다.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고학력 생존자들의 봉사활동을 전국적으로 네트워크화할 수 있다면 투병 중인 암 환자들의 사회 적응과 재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유방암을 이겨낸 강경화 씨(52). 그는 시아버지의 암 투병도 지켜보았다. “지금은 생존 희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환자에게도 다가가서 도움을 주고 싶어요. 그들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을 이야기 상대가 필요하잖아요. 내가 건강도 챙겨줄 수 있어요. 교육도 더 받으면 좋겠고요. 내 삶의 보람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녀도 계속 구원의 작은 물결에 몸을 싣고 싶어 한다.

최철주 칼럼니스트 choicj114@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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