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정양환]호부호형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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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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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환 국제부 기자
정양환 국제부 기자
영국 더타임스는 최근 자녀가 600명이 넘는 한 ‘정자 왕’을 소개했다. 1972년 타계한 버톨드 와이즈너란 남성은 생전에 마음껏 정자를 기증했던 모양이다. 인공수정 성공률도 높아 세계 곳곳에 자신의 ‘생물학적’ 분신을 남겼다. 50대인 캐나다의 영화감독과 영국의 변호사는 최근 자신들이 그의 씨를 받아 태어난 이복형제 사이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왕좌엔 영국인이 올랐지만 사실 이 분야에서 톱을 달리는 국가는 미국이다. 미 ABC뉴스에 따르면 정자를 제공하는 미국의 4개 업체가 세계 정자 공급 시장의 7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정자를 사가는 수입국은 베네수엘라와 케냐, 태국 등 100여 개국에 이른다. 시장규모도 내년이면 총 43억 달러(약 4조8800억 원)가 넘을 것으로 예상될 만큼 상승세다.

‘미제 정자’가 유독 인기가 높은 이유는 뭘까. 일단 안정성이 탁월하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정자가 들어오면 180일이 넘게 꼼꼼히 검사한다. 기증자의 병력(病歷)도 최소 3대 위까지 확인한다. 대표기업인 ‘캘리포니아 정자은행’ 관계자는 “정자 합격은 하버드대 입학보다 어렵다”고 말했다. 그만큼 ‘믿고 쓸 수 있다’는 뜻이다. 구입이 손쉬운 점도 매력적이다. 일본에서 인터넷으로 구매하면 일주일 안에 액화질소로 잘 보존한 정자를 택배로 받는다.

경쟁국들과 달리 익명성을 보장하는 점도 한몫했다. 영국은 2004년 법이 개정돼 정자를 누가 팔고, 샀는지를 공개해야 한다. 캐나다 호주 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미국은 사생활을 지켜주는 쪽이다. 정자를 산 부모는 ‘출생의 비밀’을 덮을 수 있고, 기증자 역시 나중에 “실은 내가 아버지란다”고 인정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이를 통한 미국의 이익 창출을 고깝게만 볼 일은 아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불임으로 고통 받는 부부가 800만 쌍이 넘는다. 아이를 갖고 싶은 레즈비언 부부나 싱글 여성에게도 정자 산업은 고마움의 대상이다. 미국 내에선 정자 구매자의 60%가 이런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이다.

하지만 불황을 모르던 정자 산업은 최근 윤리적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해 사고로 부모를 잃은 16세 프랑스 소년의 사연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자신이 정자를 기증받아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필요한 양육비를 생물학적 친부에게 요구했다. 아들의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미국 아버지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다. 현재 미 법원에 계류 중인 이 소송에선 법원이 소년의 손을 들어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어쨌든 아버지는 아버지니 호부호형(呼父呼兄)도 허해야 한다는 논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업계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제 누가 마음 편히 정자를 내놓겠느냐는 하소연이다. 정자를 제공했던 이들로부터 다시 회수하겠다는 요청이 빗발친다고 한다. 과학계에선 제대로 된 법 정비가 부실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스라엘의 지브 쇼함 생물학 박사는 “기술 발전이 법이나 윤리적 시각과 상충하는 경우가 잦은데도 안전망도 없이 낙관론에 기대서 일을 추진한 게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양육비를 내놓아야 하는 건 생물학적 친부가 아니라 이런 논란을 예상하지 못한 정부나 기업이 아닐까. ‘사회적 책임’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정양환 국제부 기자 ray@donga.com
#호부호형#정자 산업#윤리적 논란#사회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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