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김상훈]소비자 의약주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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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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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올해 안으로 가정상비약을 약국 외의 장소에서 살 수 있을까.

지난달까지만 해도 전망은 ‘긍정’이었다. 약사법 개정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와 전체회의를 일사천리로 통과했다. 이 사안을 1년 넘게 질질 끌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약사들의 반발 때문에 미적거리던 국회의원들도 국민의 90% 이상이 원하니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선거가 코앞이잖은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만 통과하면 ‘종료’인데 원점으로 돌아갈 분위기다. 법안은 의결정족수를 못 채워 법사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지금은 공천을 놓고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공천 문제가 해결되면 바로 선거 국면이다. 전망은 ‘부정’으로 급반전됐다.

사실 법안이 통과돼도 마뜩지 않다. 약사들도 챙기고 국민 눈치도 보자니 법안은 누더기가 됐다. 약국 외 판매가 허용되는 약품은 20종으로 제한했다. 게다가 하루 치 이상은 팔 수 없다. 편의점 같은 24시간 연중무휴 점포에서만 취급할 수 있다. 소비자가 쉽게 약을 구하게 하겠다던 당초 포부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해 미국 연수시절 경험이 떠오른다. 직원도 없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였다. 주전부리를 달라는 아이들의 성화에 자동판매기로 다가갔다. 그때 타이레놀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가정상비약이 자동판매기에서 과자와 함께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약을 자동판매기에서 팔다니. 문화충격이라고 해야 할까.

대형마트에서도 약을 팔고 있었다. 점원은 원하는 약은 다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매니저에게 물었다. “오남용 위험이 있는데 이렇게 마구 팔아도 되나요?”

매니저는 기자의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에서는 약국에서만 약을 판다는 기자의 설명에 매니저는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비자가 사리판단을 못해 오남용할까 봐 약을 못 판다는 한국이 유별난 걸까, 아니면 미국이 무감한 걸까.

7년 전의 일이다. 근육질 남성의 팔뚝을 배경으로 ‘대한민국 중년들이여 단단함을 지키자’라는 카피가 달린 광고가 몇몇 일간지에 실렸다. 별 문제가 없는 광고 같은데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즉각 제재 조치를 내렸다. 이 제약사는 발기부전치료제를 생산하고 있었다. 식약청은 ‘단단한 팔뚝’을 간접광고로 해석한 것이다. 현행법상 의사 처방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은 일간지나 방송 광고가 금지돼 있다.

이 해프닝은 소비자의 알 권리 논쟁으로 번졌다. 당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 응답자의 59.5%는 “처방되는 약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해프닝을 계기로 동아일보가 한 조사에서도 42.6%가 “의사가 어떤 약을 처방하는지 환자가 알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소비자들은 “우리도 권리가 있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이내 논쟁은 잦아들었다.

미국 TV에서는 동맥경화증 발기부전 심장병 등 전문의약품 광고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소비자의 ‘무식’을 항상 지적하는 ‘전문가’의 견해에 따르면 허용해서는 안 될 광고다. 그렇지만 미국 소비자들은 차분하다. 광고도 과장하지 않는다. 병을 앓았던 모델이 약을 먹은 뒤 달라진 점을 말한다. 자막으로 부작용을 알려주면서 웹사이트와 전화번호도 함께 보여준다.

미국식품의약국(FDA) 조사에서 환자의 43%가 광고에서 약 정보를 얻지만 61%는 부작용 부분을 가장 먼저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시 소비자는 현명하다. 그러나 우리에겐 그런 선택권이 없다. 미국인에게는 있지만 우리에겐 없는 것. 그건 바로 소비자 의약주권이다.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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