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김용규]‘안은 내’가 ‘안긴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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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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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김용규
철학자 김용규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야 자연과 사회에서 발생하는 위험에서 벗어나고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지 않겠는가. 이웃 사랑을 유난히 강조한 예수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도 따져 보면 이와 무관치 않다. 예수의 교훈에는 자기 사랑이 이미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이 가르침을 따른다면 이웃도 역시 미워하게 될 테니 말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냐 하는 데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의외로 무지하다. 보통 남이야 어찌 되었든 이기적으로 사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자기애와 이기심을 구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애는 우리가 자연적으로 가지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공연히 쓸데없이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기심은 돈에 대해 인색한 사람이 가지는 애착심같이 정도가 지나친 자기애를 말하는 것이지 정상적인 자기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서 자기애는 필요한 것이며 모든 행복의 근원이지만, 이기심은 그릇된 것이고 온갖 불행의 근원이다.

이웃을 사랑해야 자신을 사랑하는 것


독일 출신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도 이기적인 사람은 필히 불행하다고 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라지만 남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일에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로부터는 자기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좌절감을 맛보고, 자기 자신에게서는 남들에게 주는 기쁨을 모르기 때문에 공허감을 느낀다. 그래서 프롬은 이기심을 ‘자기 파멸적인 자기애’로 규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 적게 사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올바른 자기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가? 옛 성현들과 철학자들은 하나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며 이타심을 강조했다. 하지만 터놓고 이야기해 보자.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말인가! 한마디로 궤변이 아닌가! 솔직한 우리의 심정이다. 그런데 최근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룬 뇌과학이 그렇지 않다는 근거를 하나둘씩 밝혀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거울 신경세포’가 가진 공감 능력의 발견이다.

1996년 이탈리아 신경과학자 자코모 리촐라티와 그의 동료들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를 ‘사이언스’에 발표해 학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상대의 고통을 보면 원숭이의 뇌 안에 있는 거울 신경세포가 통증을 유발하는 감정 중추를 자극해 그 고통을 자기의 것처럼 느끼게 한다는 내용이다. 이후 과학자들은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장치를 통해 인간의 거울 신경세포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했다. 그 결과 거울 신경세포가 고통뿐만 아니라 수치심, 당혹감, 자부심, 행복과 같이 훨씬 복잡한 사회적 정서도 공감하게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세포를 ‘공감 신경세포’라고 부른다. 마치 소리굽쇠가 옆에 있는 다른 소리굽쇠의 진동에 공명(共鳴)하여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것처럼 상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신경세포라는 의미다.

워털루대 철학 교수이자 인지과학자인 폴 새가드는 거울 신경세포가 가진 윤리학적 함의를 정리했다. 요컨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자신이 행복해지는 방법이고,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자기가 불행해지는 길이라는 내용이다. 거울 신경세포 연구는 결국 우리가 왜 이웃의 행복을 도모해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종교적 문제에 대한 과학적 해답을 제시한 셈이다. 동시에 자기 사랑이란 이기심보다는 이타심과 손잡고 있다는 성현들과 철학자들의 궤변 같은 가르침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고개를 갸우뚱할 것 없다. 우리가 익히 아는 ‘천국과 지옥 우화’를 떠올려 보자. 지옥에도 음식은 많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팔보다 더 긴 수저를 들고 있어 아무도 음식을 자기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모두가 굶주리는 고통을 받고 있다. 천국도 상황은 같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앞사람의 입에 음식을 떠 넣어준다. 당연히 모두가 배불리 행복하게 산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는가? 남을 행복하게 하는 내가 남에 의해 행복해지는 나를 만든다는 진실이 아닌가. 남을 사랑하는 내가 남에게 사랑을 받는 나를 만든다는 진리가 아닌가.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 같은 관계의 원리를 ‘상호주관적 매듭’이라고 불렀다.

눈 딱 감고 누군가를 포옹해보라


가정이든 사회든 이기심에 의한 갈등과 분쟁이 만연한 시대다. 그럴수록 눈 딱 감고 곁에 있는 누군가를 포옹해 보라. 가족이든 동료든 생면부지이든 관계없다. 또 적이면 어떠랴. 그를 ‘안은 내’가 그에게 ‘안긴 나’를 만들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렇게 해서만 행복해질 수 있고, 아마도 세상은 이렇게 해야만 천국에 한 걸음 가까워질지 모른다.

김용규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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