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임혁백]‘지우개 정치’와 민주적 책임성의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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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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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한국 정당은 지속성이 없을 뿐 아니라 제도화가 돼 있지 않다. 그렇기에 대선후보가 소속 정당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정강, 정책을 이어받는 미국과는 달리 민주화 이후 우리의 대선후보는 집권당 출신 현직 대통령과 정부의 실정과 비리에 대해 책임을 지려 하지 않고 현직 대통령의 유산을 지워 자신은 깨끗하게 새 출발을 하겠다는 ‘지우개 정치’를 반복해 왔다. 그래서 집권당 대표는 당명을 바꾸거나 새로운 당으로 재창당하거나 다른 당과 합당을 해서 다른 얼굴로 성형해 새 정당에서 현직 대통령의 얼굴과 행적을 지우려 하고, 야당 대표나 후보는 새 당을 만들거나 통합해 과거의 잘못은 모두 헌 당에 묻어놓고 좋은 것만 새 당에 담아 새 정치를 하려 한다. 주권자인 국민이 어떻게 그들의 과거 행적을 보고 있는가는 안중에 없다.

‘지우개 정치’는 민주적 책임성의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선거 때만 되면 국민의 ‘충성스러운 종’ ‘심부름꾼’ ‘완벽한 대리인’이 되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대표들이 국민의 위임을 위배, 위반, 거역했을 때 다음 선거에서 그 대표에게 책임을 물어 낙선이라는 벌을 내려야 하는데 ‘역사가 평가할 수밖에 없는’ 단임 대통령제와 더불어 수시로 당명을 바꾸는 ‘지우개 정치’는 책임 소재지를 불분명하게 하여 책임정치를 실현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그래서 직접민주주의 옹호자인 루소는 영국의 대의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큰 오산이다. 그들은 국회의원을 선출할 때만 자유로울 뿐이다. 의원들이 선출되자마자 영국인들은 노예가 되어 버린다”라고 조롱했다.

黨名수시로 바꿔 책임정치 외면

루소가 조롱한 대의민주주의의 결함은 대표와 정당으로 하여금 주권자인 국민의 ‘완벽한 대리인’으로 행동하게끔 강제하고 책임지게 할 수 있는 ‘민주적 책임성’을 확보했을 때 시정될 수 있고, 그럴 때 국민은 선거철이 아니더라도 주권자이고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선거의 해인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집권당과 제1야당이 모두 당명을 바꿔 ‘지우개 정치’를 하면서 한국의 민주적 책임성의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한나라당이 지지율 하락에 당황하여 박근혜를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출범시킨 뒤 첫 개혁 조치로 내놓은 것이 ‘새누리당’으로의 당명 변경이었고, 이보다 앞서 민주당은 시민통합당과의 통합을 구실로 민주통합당으로 개명했다. 이러한 ‘당명 바꾸기’는 선거를 앞두고 지난 4년 또는 5년간의 실정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과거를 ‘지우는’ 성형을 한 ‘지우개 정치’의 전형이다. ‘새누리당’은 지난 4년간 ‘한나라당’이 저지른 실정을 이름을 바꿔 모면하고, 더 나아가 이명박 대통령과 분리, 차별화하여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자신은 책임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정당이다. 당명 바꾸기 병은 민주통합당이 더 심하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민주통합당은 민주당, 열린우리당, 중도통합민주당, 민주당, 통합민주당, 민주당으로 6번의 분당, 합당, 통합을 위한 당명 바꾸기 끝에 탄생한 전형적인 ‘성형 정당’이다.

‘당명 바꾸기’가 ‘지우개 정치’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한국에서는 야당일 때보다 집권당일 때 이름 바꾸기 성형이 더 심했다는 데서 발견된다. 한나라당의 뿌리는 1991년 3당 통합으로 탄생한 민자당이었는데 ‘한 지붕 세 가족’ 당으로 불릴 정도로 오래가지 않아 분열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선 패배가 기폭제가 돼 한나라당이 공중분해 아니면 분당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연속으로 패배하였음에도 한국 정당사상 최장기인 15년 동안 동일 당명을 고수하면서 단결해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재탈환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의 장기 지속성은 한국 정당의 제도화에 서광을 던져주었고 정당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됐다. 그런데 한나라당도 집권여당으로 복귀한 뒤에는 다음 선거를 앞두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뒤로하고 다시 고질적인 당명 변경을 시도하여 새누리당으로 바꿔 집권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권의 실정으로부터 면제받으려 하고 있다.

유권자가 ‘숨겨진 본질’ 심판해야

그러나 영화 ‘페이스 오프’에서 다른 사람의 얼굴을 완전히 이식하는 성형을 하더라도 주인공의 본질이 바뀌지 않듯 정당이 이름을 바꾸더라도 그 정당의 과거 행적을 지울 수 없고 결국은 국민의 심판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주권자인 국민만이 ‘지우개 정치’가 민주적 책임성의 정상적인 작동을 방해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어떤 정당이 이름을 바꾸더라도 본질이 바뀌지 않았을 때 그 숨겨진 본질을 파악해서 그 정당에 상과 벌을 내릴 수 있는 ‘깨어 있는 시민’이 존재하는 한 ‘지우개 정치’는 설자리가 없을 것이다. 공자는 ‘정치는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고 그중에서도 ‘이름을 바르게 해야 한다(必也正名乎)’고 설파했다. 우리 정당이 새겨들어야 할 경구다.

임혁백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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