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송평인]시민發 ‘보수의 재구성’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2월 9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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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논설위원
송평인 논설위원
한나라당의 재구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수의 재구성이다. 한나라당을 보수와 같이 놓지 말라. 서구 역사에서 정당은 시민사회에서 태어난 것이지만 한국의 정당은 그렇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엄밀히 말하면 우파 시민세력에 무임승차한 정당”이라는 전여옥 의원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한나라당만이 아니라 민주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민세력은 이 정당들이 만들어준 우리에 갇혀 사는 집토끼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기점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박원순과 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좌파 시민세력이 민주당과 손을 잡고 정치권 진입에 성공했다. 시민세력이 중심이 되는 정당의 재구성이 시작된 것이다.

한나라당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보수의 위기는 진보의 재구성에 상응하는 변신을 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보수의 재구성도 당 밖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지금 한나라당의 문제는 쇄신을 요구받은 쪽만 아니라 쇄신을 추구한 쪽도 매력이 없다는 점이다. 남경필 원희룡 같은 쇄신파는 각각 4선, 3선의 의원임에도 불구하고 처신은 늘 초선처럼 하는 정치적 난쟁이들이다. 유승민은 한 번은 이회창, 한 번은 박근혜의 측근으로 두 차례나 대통령 만들기에 실패한 전력이 있는, 신뢰할 수 없는 킹메이커다.

한나라당 내부의 찻잔 속 폭풍은 그들만의 리그에서의 권력투쟁에 불과하다. 한나라당 밖에서 시작되는 움직임만이 진정한 보수의 재구성에 기여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이 없지는 않다. 보수 시민세력을 자처하는 박세일이 신당 창당을 모색하고 있다. 박원순 모델과는 다른 것이지만 시민세력에 기반을 둔 정당을 추구한다는 점은 비슷하다. 자칫 박세일 신당이 보수의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시도해볼 가치가 있다.

지금 보수에 필요한 것은 자진해서 카오스(chaos·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고 그 속에서 무엇인가 새롭고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나도록 지켜보는 것이다. 박근혜가 먼저 자기만이 보수의 대권주자가 돼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대권경쟁의 장(場)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진보 진영만큼 인물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박근혜가 사라진 장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들이 진가를 발휘할 수도 있다.

이 시대는 근엄함보다 발랄함을 좋아한다. 20여 년 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는 회색 정장을 착용한 정치인들 사이에서 청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며 미국식 어휘를 구사해 신선함을 줬다. 영국 보수당이 블레어를 벤치마킹해 만들어낸 것이 30대 젊은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시대는 순발력과 촌철살인의 말솜씨를 필요로 한다. 보수에서도 시대를 따라잡는 발랄한 지도자들이 나와야 한다.

좌파 베끼기에 그쳐선 성공 못해

전 세계적 맥락에서 신자유주의의 퇴조는 보수의 타협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 복지 확대가 불가피한 대세처럼 보인다. 어차피 재구성은 상대편의 정책을 어느 정도 베끼는 것이다. 영국 노동당의 블레어는 대처리즘의 시장주의를 수용해 ‘제3의 길’을 만들었고 보수당의 캐머런은 국립의료체제(NHS)를 적극 지지하는 ‘온정적 보수주의’를 만들었다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든 박세일이든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베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보수에는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가 있다. 같은 돈을 들인다면 복지보다는 고용이다. 복지란 정부 돈을 민간부문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공공부문의 일자리 창출도 역시 정부 돈을 민간부문으로 이전하는 것이다. 일자리는 복지와 달리 개인의 자긍심을 높여준다. 그렇다면 단순한 복지의 확대보다는 공공부문의 일자리 창출이 효과적이다. 블레어조차도 이미 20여 년 전에 ‘복지에서 고용(Welfare to Work)으로’의 구호를 내걸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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