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기홍]페일린에게 배울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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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0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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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국제부장
이기홍 국제부장
세라 페일린 전 미국 알래스카 주지사가 한국에 왔다. 내년도 미국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뒤 첫 나들이다. 서울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모습을 보니 2008년 9월 초의 ‘페일린 선풍’이 기억난다.

무명의 초선 주지사에서 일약 공화당 부통령후보로 발탁된 페일린은 9월 3일 40분간의 후보 수락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힘과 가족의 가치, 미국의 미래를 역설했고 ‘만루홈런을 쳤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낙태 및 동성애 반대, 총기 허용, 재정지출 억제 등 보수주의 이념을 확고히 체화한 미인대회 출신의 젊은 여성 주지사는 보수의 희망으로 떠오르기 충분했다.

하지만 장밋빛 기대는 곧 거품으로 드러났다. 검증과정에 들어가자 언론 인터뷰를 한사코 기피하더니, TV토론에서 ‘빈약한 콘텐츠’를 여실히 드러냈다. 보수주의 가치의 포장만 달달 외울 뿐 그 진정한 의미와 콘텐츠는 체득하지 못한 빈 깡통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수파를 진짜 실망시킨 건 실력 부족이 아니었다.

주지사 공무출장에 가족들을 데리고 다니며 여행비용을 공금으로 결제하고, 당의 선거자금으로 유세 때 입을 럭셔리 브랜드 옷을 15만 달러어치나 산 사실이 드러났다. 여동생의 전 남편(현직 경관)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거부한 치안국장을 해임했고, 친구들의 일자리를 알아봐줬다.

공화당엔 미국의 오늘을 이끌어온 원로가 많다. 하지만 그들은 올드보이다. 젊고 참신한 차세대 우파 리더가 등장해 리버럴에 맞서 미국의 가치를 지켜주길 기대했던 꿈이 페일린에게 모아졌지만 리더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페일린은 자신에게 엄격하지 못했고, 공사 구분을 못했다. 나이만 젊을 뿐 구태를 답습한 올드우파였던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보수주의의 위기는 젊은 유망주들이 사이비 우파로 변질되기가 너무 쉽다는 점이다.

박원순 저격수를 자처하며 날카로운 폭로를 하는 소장파 의원이 하필이면 성희롱 논쟁의 장본인이라는 데 우파의 비극이 있다. 주사파로 뛰다가 허상을 깨닫고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전파해온 뉴라이트 논객이 생방송을 앞두고 폭탄주를 들이켜는 무분별함을 지녔다는 점도 보수진영의 얄팍한 인재풀을 보여준다.

국민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겪으면서 진보진영 차세대 기대주들의 허상과 위선에 실망했다.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이불 홑청을 꿰매며/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르며’ 살았을 것으로 여겨졌던 운동가들이 이런저런 끈을 잡고 하루아침에 고위직 감투를 차지했다. 그런 그들 가운데 고급 승용차와 여비서, 호화로운 사무실, 법인카드가 죄스럽고 송구스러워서 사양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끼리끼리 챙겨먹기, 을(乙)에게 큰소리치기, 실력자에게 굽실대기는 군부독재에 영합해 살던 낡은 우파들을 뺨칠 정도였다.

좌파는 당장 약자에게 도움이 될 정책을 내세우고, 우파는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도움이 될 해결책을 모색한다. 이 때문에 우파는 강자, 부자의 편으로 비치기 쉽다. 그런 만큼 우파의 리더, 논객이 되려면 더더욱 자기 절제와 신독(愼獨)이 요구된다.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이 페일린을 만나 대담을 나눴다고 한다. 후광 효과를 통해 여성리더의 이미지를 강화하려 했다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짚었다. 차세대 보수주의 리더로 자라나기 위해서는 얼마나 뼈를 깎는 자기 절제와 공부가 필요한지, 자칫하면 바로 낡은 보수로 변질될 수 있음을 경계하게 해주는 반면교사라면 또 모를까.

이기홍 국제부장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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