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성욱]정전사태 때 당신은 어디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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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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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전기는 공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공기처럼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마치 공기처럼 평소에는 그 존재를 잊고 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정전은 마치 공기가 희박해져서 숨이 턱하니 막히는 것과 비슷하다. 전기가 나가면 가정의 전등과 냉장고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가전제품이 작동을 멈추고, 건물의 냉난방은 물론이고 엘리베이터와 환풍기도 멈춰버린다. 창이 없는 백화점 같은 건물이나 주거와 쇼핑 공간으로 개발된 지하 공간은 낮에도 밤처럼 어두워진다. 밤에 전기가 나가면 도시는 암흑의 바다가 된다. 문명의 상징 백야성의 도시가 ‘흑야성’으로 바뀐다.

정전이 되면 사람들은 우왕좌왕한다. 지금만이 아니라 전기가 처음 대중적으로 사용되었을 때부터 그랬다. 1920년 동아일보에는 조석으로 발생한 네 시간의 대정전 때문에 전차가 멈추고 서울(경성)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지방은 더 심했는데 순천에는 1926년에 4일간 어둠이 계속된 적도 있었고, 김해에서는 반나절 이상 연속으로 정전이 되기도 했다.

어둠의 도시에서는 익숙한 모든 것이 낯설고 무서운 존재로 변하지만 이것이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1965년 11월 9일, 예고 없는 정전이 뉴욕을 포함한 미국 동부와 캐나다 온타리오를 강타했다. 3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15시간 넘게 전기 없이 지내야 했다. 그렇지만 당시 뉴욕 시민들의 대처는 놀라울 만큼 침착했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던 심성을 끄집어내서 이를 타인에 대한 연대감으로 묶어 냈다. 6만 명이 넘는 시민이 지하철에 갇혔지만 당황하거나 절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 지하철에서는 열차가 멈추고 차장이 사태를 설명할 때까지 사람들이 20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송을 기다리기도 했다.

암흑천지 속 사람들 우왕좌왕

당시에도 아파트의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이 많았는데, 아파트 주민들은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노래를 불러 주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전기스토브를 사용하고 있어서 정전이 되자 음식을 만들지 못했다. 하지만 가스스토브를 쓰던 주민 중에 음식을 만들어서 동네 사람들에게 나눠준 사람이 많았다. 전기가 나가자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던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야 했는데, 한 백화점 앞에서는 말없이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리 흥겹게 춤이나 춥시다”라는 시민의 제안에 모두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TV가 꺼지고 어두운 밤에 할 일이 없어지자 ‘사랑을 나누는’ 커플이 급증했다는 설도 있었는데, 실제로 1966년 8월 뉴욕타임스는 ‘정전 9개월 뒤 출산율 상승’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의 건축가이자 문명 비평가였던 루이스 멈퍼드는 기계가 없어져야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이 정전은 자신의 철학의 타당성을 잘 보여주는 실례였다. 그는 뉴욕이 암흑천지가 되면서 “도시는 죽었지만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살아났다”고 강조했다. 점점 기계 같은 삶을 살던 인간이었지만, 기계가 죽으면서 숨어 있던 인간성이 발현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경찰은 정전 기간에 약탈이나 방화와 같은 폭력적인 범죄가 거의 없었고, 범죄율도 평소보다 오히려 낮게 집계되었다고 발표했다. 1965년 11월 정전 당시 뉴욕 시민들이 경험했던 낯선 즐거움과 연대감은 도리스 데이가 주연한 영화 ‘전기가 나갔을 때 여러분은 어디에 있었나요?’(1968년)의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밝은 전등으로 상징되는 기계 문명은 인간에게 잠재된 야만성도 같이 억누르고 있었을 수 있다. 흑야성의 도시에서 인간성의 어두운 부분도 스멀스멀 기어 나올 수 있다. 1977년 또다시 뉴욕 전체가 정전되었는데, 경찰은 이 밤이 ‘테러의 밤’이었다고 몸서리친다. 자동차 전시장이 약탈당하고, 전자제품 가게가 털리고, 하룻밤 사이에 1700건의 가짜 응급전화가 걸려오고, 평소보다 여섯 배나 많은 방화가 자행되었다. 10대 소년부터 60대 노인까지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가게를 약탈하는 데 동참했다. 거리는 무법천지였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억눌렸던 인간의 본성 드러나

이번 정전을 놓고 장관이 사퇴해야 한다는 등 책임 소재 공방이 한창이며, 피해 보상과 관련해 소송 얘기도 무성하다. 갇히고 두려움에 떨고 손해를 본 사람들 얘기만 보도되는데 신호등이 꺼져서 차가 엉킨 도로에 뛰어들어 교통정리를 한 시민들, 주민이 엘리베이터에 갇히자 신고를 해 주고 소방대원이 올 때까지 얘기를 나눈 이웃들도 있었다.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번 정전의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고 전력수요 예측과 안전관리 등을 더 강화하겠지만, 전문가들은 일반 시민들이 무슨 경험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그래서 한 번쯤 생각하고 기록해 두자. 2011년 9월 15일, 전기가 나갔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지를.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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