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홍사종]오리나무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9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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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이야기숲학교 교장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이야기숲학교 교장
이른 아침 제법 서늘해진 바람 사이로 뽀얀 운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나의 집 뒷동산 자락에 죽은 오리나무 숲에서 실낱같은 아우성이 들렸다. 가까이 가 귀 기울여 보니 여름 내내 오리나무 잎벌레에게 잎을 다 갉아 먹힌 채 처참하게 생을 다했던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일제히 준동하는 소리였다. 벌레에게 몸을 뜯긴 이파리들이 낙엽이 되어 뒹굴고 급기야 때 이른 계절에 나목이 되어 죽은 줄만 알았던 오리나무가 다시 생명의 시계를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수년 전부터 경기 화성시 바닷가에 있는 나의 집 뒷동산의 오리나무들은 계속되는 수난에 시달렸다. 1970년대 폐허가 된 한국의 민둥산을 살리는 사방용(砂防用) 수종으로 선택된 오리나무는 아까시나무와 함께 한국 산을 비옥하게 한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아까시나무와 오리나무는 새롭게 심어진 잣나무림, 소나무림 등에 밀려 잡목 신세로 전락했다. 뒷동산의 그 많던 오리나무도 잡목 제거 사업에 걸려 참혹하게 도륙을 당했다. 잡목이라니, 오리나무의 입장에서는 듣기에 원통한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사람들의 세상도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모여 건강한 사회를 이루듯 나무도 활엽수 침엽수가 골고루 어울려야 건강한 숲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오리나무는 인간의 자의적 기준에 의해 몇 차례나 수난을 당했다. ‘잡목’이라는 차별 대우로 잘려 나갔을 뿐만 아니라 이웃 산주가 제시한 지적등본에 수목갱신사업지로 편입돼 불운을 당하기도 했다. 인간보다 이 지구상에 수억 년을 먼저 자리 잡고 살아온 나무의 오래된 불문적 권리장전은 자기들 멋대로 그어온 종이금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됐다. 이 살육의 현장에서 가까스로 몸을 지킨 뒷동산 오리나무 수십 그루마저 올여름 벌레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당한 것이다.

민둥산을 비옥하게 만든 일등공신

신록이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5, 6월. 추운 겨울을 낙엽 속에서 견뎌낸 오리나무 잎벌레들이 가지를 타고 오를 때부터 오리나무 숲은 육감적으로 느껴지는 공포와 긴장에 떨었다. 6mm 안팎의 광택이 나는 이 작은 남색 벌레는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파리 뒷면에 무수한 덩어리로 수천 개의 노란색 알을 산란했다. 그 알이 부화하면서부터 나뭇잎은 유충들의 식량창고가 됐다. 잎이 없으면 광합성을 못하는 나무와 잎을 갉아먹어야 삶이 유지되는 벌레의 생존을 건 사투에서 식물인 나무는 언제나 약자의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드디어 7, 8월 오리나무숲은 번데기에서 우화한 성충으로 가득하고 새까맣게 잔등을 드러낸 채 이파리를 갉아대는 벌레들의 매몰찬 공격 앞에 희생물이 된다. 새순 옛순 가리지 않고 벌레 먹은 것처럼 초토화되던 잎들은 희뿌연 뼈대를 드리운 채 하나둘 삶을 포기하며 낙엽이 되어 사라져갔다. 그런데 죽었다고 믿었던 오리나무가 다시 살아난 연유는 무엇이었을까.

뒷동산의 오리나무들은 그 필살의 습격에도 살아남는 놀라운 지혜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으로 도를 감추고 있으면서 밖으로 도력을 드러내지 않는 포도잠거(抱道潛居)의 슬기를 발휘한 것이다. 비록 꼼짝달싹도 하지 못한 채 벌레에게 온몸을 내어준 오리나무지만, 오랜 생존의 경험으로 벌레의 공격시점과 행동의 끝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7, 8월 우화한 오리나무 잎벌레 성충의 최후 공격이 시작되는 순간, 위협을 감지한 나무는 놀라운 기지로 광합성을 멈추고 뿌리의 생장활동을 중지했다. 생장을 하지 않고 하면(夏眠)상태가 된 나무는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잎을 벌레의 먹이로 내어준다. 달리 저항할 방법을 찾지 못한 오리나무들이 선택한 포도잠거의 시간은 놀랍게도 우화한 성충이 활동을 멈추는 8월 하순까지다. 성충이 떠난 후 모든 나무가 왕성한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영양을 충분히 축적한 채 낙엽 떨어뜨릴 준비에 여념 없는 시간에 오리나무는 허약해진 몸의 양분을 보충하기 위해 거꾸로 가지에 신록의 옷을 입는다.

영민한 나무에 ‘식물인간’이라니

숲 속에서 오리나무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시간도 바로 이 순간이다. 모자란 광합성을 보충하기 위한 오리나무의 사투는 눈물겹다. 때로는 햇살을 받는 면적을 넓히기 위해 두 배나 큰 잎을 내기도 하고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양분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겨울잠 자는 시간도 최대한 늦춘다. 혹자는 추운 겨울날 산속 앙상한 나목들 사이에서 짙푸른 잎사귀를 매단 채 몸을 떨며 햇빛 모으기에 열중하고 있는 나무들을 기억하리라. 그리하여 뒷동산의 오리나무는 올여름 유난히 극성이었던 벌레의 폭압 속에서도 살아남아 긴 겨울의 터널을 뚫고나와 내년 생명의 숲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식물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만약 뒷동산의 영민한 오리나무가 이런 오만무도한 인간의 말을 듣는다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이야기숲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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