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정연욱]계파 해체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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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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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일본 총리는 1976년 록히드 뇌물사건으로 체포되자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다나카파의 막후 영향력은 여전했다. 1978년 출범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내각이 ‘가쿠(角)그림자 내각’으로 불릴 정도였다. 풍부한 자금력은 계파 융성의 자양분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계파정치의 영향력은 다소 약화됐지만 아직도 다양한 형태로 계파가 남아 있다. 일본의 계파정치를 정경유착의 뿌리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자민당 내 파벌의 치열한 경쟁이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는 관점도 있다.

▷김영삼(YS) 대통령은 대선을 관리할 마지막 국무총리에 호남 출신인 고건 전 서울시장을 발탁했다. YS는 사석에서 고 총리의 부친인 고형곤 전 전북대 총장과의 정치적 인연을 종종 얘기했다. 1963년 야당인 민정(民政)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고 전 총장은 YS와 같은 옛 민주당 구파에 속했다. YS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민주당 신파였다. 한국 정치에서 상도동계(YS)와 동교동계(DJ)는 민주화 투쟁기를 거치며 가장 오래 살아남은 계파일 것이다.

▷7·4 전당대회로 한나라당의 세력 판도가 완전히 역전됐다. 친박(親朴)계는 주류로 올라섰고, 친이(親李)계는 몰락에 가까운 패배를 맛보았다. 그동안 친이계의 독주 속에서 친박계가 대오를 유지한 배경엔 박근혜 후광 효과가 크게 작용했다. 영남에선 돈이나 조직 없이도 박 전 대표와 찍은 사진을 들고 선거를 치른 인사들이 많았다. 한 친박계 의원은 “영남권에서는 박근혜 마케팅이 10년 넘게 이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당선 일성으로 계파 해체를 선언하자 당이 술렁거리고 있다. 정몽준 전 대표는 “윽박지르거나 힘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계파 해체론(論)의 이상은 그럴듯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선 많은 사람이 회의적이다. 이제 박근혜 천하가 된 것 같은 한나라당에서 다른 계파가 존재감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한 원로 정치인은 “정치는 써레질”이라고 풀이했다. 계파별 이합집산을 써레로 논바닥을 고르는 일에 비유한 것이다. 계파는 정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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