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미석]내 눈이 나를 속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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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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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전문기자
고미석 전문기자
처음엔 눈이 이상한가 싶었다. 똑같은 그림인데 멀리 바라볼 때와 가까이 볼 때 색과 형태가 달라진다. 녹색과 주황색 줄무늬가 병렬된 이미지를 몇 발자국 떨어져 살펴보면 원래 화면엔 없었던 노란색이 환각처럼 나타난다. 그림 속에 항아리 같은 이미지가 보였는데 막상 다가서니 직선으로 배열된 규칙적 패턴만 존재한다.

미술전시를 통한 색다른 깨달음

베네수엘라 작가 카를로스 크루스디에스가 색과 눈의 착각을 연구해 만든 작품을 만나면서 색다른 즐거움과 깨우침을 얻었다. 그의 작품에선 색과 무늬의 조합에 따라 존재하지 않는 환영이 생겨난다. 내가 확고하게 믿는 것이 오롯이 진실은 아니며, 시각의 착각으로 내가 나를 속일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인간이 눈에 들어온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주변 맥락과 비교하고 뇌에 저장된 지식과 정보를 결합해 인지하는 데서 빚어진 일이라고 한다. 바로 이웃에 어떤 색이 존재하느냐에 따라 분명 같은 빨강인데 전혀 다른 색처럼 보인다. 색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착시효과라는 것도 내가 무엇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일 터다. 착각도 그런 것일 게다.

내 눈에 보이는 색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어디 색채의 우주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을 판단내리는 데 대한 의구심은 자연스럽게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돌아보게 한다. 반드시 옳다고 믿어온 많은 것. 실제로는 나만의 잣대와 나와 어울리는 이들의 처지에서 바라본 독단적 판단은 아닐까. 말다툼의 시시비비를 가려 달라는 부탁에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했다는 황희 정승의 일화가 새삼 떠오른다. 내 편인가 아닌가. 어떤 이슈든 이분법으로 심판하는 오늘의 눈으로 보면 결정을 미루는 비겁한 처세로 질타 받을지 모르지만, 내 편 네 편이 없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자세이기도 하다. “여기 있는 빗자루는 길기도 하지만 짧기도 한 것이오. 숟가락보다는 길지만 장대보다는 짧지 않소? 어떤 잣대로 재느냐에 따라 긴 것이 짧아지고 짧은 것이 길어지듯 옳고 그른 것도 누구의 입장에 서느냐에 따라 다른 법이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을 대할 때든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하오.”

딱딱하게 굳은 생각의 틀을 고수하기보다 나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마음의 문을 열 필요가 있겠다. 이런 상대적 관점, 다양성의 원리를 존중하는 것이 예술이다. 미국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고 있는 거장 이우환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예술의 메시지는 자기반성, 자기부정을 통해 앞으로 나가는 힘과 계기를 주는 것이다.”

모난 구석 다듬어진 세상을 꿈꾸며

한국 사회는 자기 생각, 자신의 색채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불변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계기만 생기면 눈 부릅뜨고 싸울 거리를 찾아내려는 이들로 인해 시끄럽고 무질서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 무모한 분별심이 연출하는 갈등과 분열은 사실 우리의 착시와 착각이 만든 환영(幻影), 헛것일지 모른다. 이런저런 점거 소식이 들리는 요즘. 살벌한 공격성에서 한발 벗어나 말과 생각의 모난 구석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둥근 세상은 불가능한 꿈인가. 헛것과 참된 것이 꿈과 현실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나날이다.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하는 사람을 보면 일 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남한테 해꼬지 한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일생을 흙 속에서 산,/…/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어머니는 한사코/오순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이대흠의 ‘동그라미’)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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