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연욱]정치인 ‘실체를 이기는 이미지’

  • Array
  • 입력 2011년 6월 23일 20시 00분


코멘트
정연욱 논설위원
정연욱 논설위원
1992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든 빌 클린턴은 조지타운, 옥스퍼드, 예일대 등 명문대를 나왔고 20대부터 정치에 발을 디뎠다. 술주정하는 계부의 폭력과 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입지전적인 길을 걸었지만 유권자들의 생각은 달랐다. 화려한 이력 탓에 그는 서민의 애환을 잘 모를 사람이라는 인상이 짙었던 것이다.

클린턴 캠프는 그가 살아온 길을 조명하기로 했다. 홍보영상물 ‘맨 프럼 호프(Man from Hope)’는 당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던졌다. 희망을 뜻하는 ‘Hope’는 공교롭게도 그가 태어난 아칸소의 마을 이름이었다. 그는 위기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1996년 미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밥 돌은 유머가 많은 정치인이었지만 유머를 모르는 지루한 노(老)정객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200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앨 고어도 기자들 사이에선 가정적인 인물로 정평이 났지만 대중에게는 차갑고 인간미 없는 관료적 모습으로 각인됐다. 두 후보는 모두 본선에서 쓴잔을 마셨다.

대중의 눈에 비친 정치인의 인상은 호감 비호감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다. 이들은 “알려진 것과 다르다”며 손을 젓지만 대중의 평가는 단순한 ‘인상비평’을 넘어선다. 유권자들은 이 프리즘을 통해 그들을 바라보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최근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를 비판하면서도 “오랫동안 지지세력을 유지해온 것을 보면 뛰어난 정치인이라고 봐야 한다. 수첩공주니 콘텐츠가 없다느니 하는 것은 모두 가당찮은 얘기”라고 말했다. ‘박근혜=수첩공주’라는 야권의 단골 메뉴를 접고 냉정히 보자는 얘기다. 박 전 대표가 쌓아온 ‘원칙’과 ‘신뢰’의 이미지도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다. 박 전 대표는 측근들 사이에서 ‘박 소장’으로 불리는 동생 지만 씨의 어느 저축은행 연루 의혹에 대해 “본인이 확실하게 말했으니 그걸로 끝난 것”이라고 잘랐다. 일각에선 권위주의적 이미지를 떠올렸다. 일부 친박(親朴) 인사들도 “박 전 대표가 굳이 그런 식으로 얘기를 했어야 했나”라고 걱정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운동권 투사였지만 그 후 옥스퍼드대를 나온 대학교수 출신이다. 4·27 경기 분당을(乙) 보궐선거에서 승리한 손 대표의 ‘합리적 중도 이미지’를 만든 밑거름이다. 하지만 매사 너무 재는 듯한 부정적 인상도 있다. 한 정치권 인사는 “손 대표는 흡인력이 없다”고 꼬집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한때 복지부 공무원들로부터 ‘베스트 장관’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지지그룹과 안티층이 확연히 갈리는 갈등의 프레임에 갇혀 있다. 한나라당의 김문수 경기도지사, 오세훈 서울시장, 정몽준 전 대표는 강력한 인상 자체가 구축되지 않은 감이 있다.

대중이 대선주자들에 대해 갖는 인상은 그 자체로 실체다. 이를 외면하면 정치현장에서 버틸 수 없다. 18개월 남은 18대 대선까지 대선주자들의 이미지는 긍정과 부정, 호감과 비호감이 교차하면서 요동칠 것이다. 1990년대 후반만 해도 개혁의 아이콘이었던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는 2002년 대선 무렵 수구(守舊)의 대명사로 내몰렸다.

정치컨설턴트의 아버지로 불리는 미국의 조지프 나폴리탄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리얼리티(reality·실체)를 중시하라. 나는 언제든 (대중이 느끼는) 퍼셉션(perception·인식)에 의존할 것이다.”

정연욱 논설위원 jyw11@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