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대중스타가 숨 쉴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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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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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윤종 문화부장
유윤종 문화부장
클라우스 만의 소설 ‘비창교향곡’에는 19세기 러시아의 작곡 거장 차이콥스키가 콘서트 투어로 들른 도시를 떠날 때마다 여학생들이 울부짖으며 눈물 젖은 손수건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날 팝스타들이 받는 대접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그런데 이 당대의 스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그는 자기 시대의 윤리기준에서 용납될 수 없는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당시엔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차이콥스키의 비밀을 알아챈 법률학교 동문들이 그를 ‘동문 청문회’에 소환해 자살을 강요했고 작곡 대가가 이를 받아들여 콜레라를 가장한 비소 투약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오늘날 설득력을 얻고 있다.

30대에 쫓기듯 한 번 결혼한 뒤 며칠 만에 도망치듯 이혼했던 차이콥스키에게 당시 대중이 “이혼의 진짜 이유는 뭔지” “왜 그 후 혼자 살았으며 연인은 없는지”를 집요하게 캐내 알아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교향곡 ‘비창’을 비롯해 인류 정신사의 기념비로 평가받는 그의 후기 교향곡과 발레곡 등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문화 대통령’으로 불렸던 서태지와 연기자 이지아가 한때 부부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 대중은 놀라움에 휩싸였다. “감쪽같이 속았다”는 성난 목소리도 나오고 있고, “스타에게도 그 정도의 비밀은 필요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대중문화평론가 임진모 씨는 “유명인은 철저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려는 본성을 갖게 된다. 남들이 볼 때 신비주의로 비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단지 그것만이라고 단정하긴 힘들 것이다. 그가 말하는 ‘쉴 수 있는 공간’ 확보의 본능에 ‘인기 전략으로서의 신비주의’도 얼마간 합쳐진 결과일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을 우리는 비난할 수 있을까, 또는 비난해야 할까. 여기에는 정교한 구분이 필요할 듯하다. 인기인이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해 휴식하고 창작의 에너지를 얻는 것은 죄가 아니다. 공개하기 싫은 일은 의당 감출 수 있다. 바그너가 후원자인 베젠동크의 부인과 사랑에 빠졌다가 빗발치는 관심을 피해 베네치아로 건너간 뒤 대운하의 반짝이는 물결을 내려다보지 않았다면, 공적 사적 책임의 이행은 논외로 하더라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저 아름다운 아리아 ‘사랑의 죽음’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태지와 이지아는 해명하고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 1996년 두 사람의 결혼 관련 보도가 나왔을 때 서태지 측이 이를 사실무근으로 몰아붙이고 법적 대응을 거론하며 압박했다면 그는 당시 일에 대해 해당 언론사와 기자에게 사과하고 대중 앞에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지아는 그것이 관행이든 아니든 나이와 그 밖의 이력 일부를 속인 데 대해 사과해야 한다. 확인해 주고 싶지 않은 일을 확인해 주지 않는 것과 크건 작건 사실을 호도해 팬과 대중을 기만한 일은 다른 문제다.

당장이 아니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두 사람은 사람들 앞에 나서 이번 일과 관련된 의문들을 솔직하게 풀어주기 바란다. 그 대신 그 밖의 감춰두고 싶은 일에 대해 응답하기 싫다면 우리는 이를 양해하는 것이 온당하다. 이들이 자신만의 영역에서 휴식할지, 다시 한 번 뜨겁게 열정을 불태우며 자신들이 가진 빛으로 팬들을 열광시킬지는 그 다음 일이다.

유윤종 문화부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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