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그래도 개혁은 계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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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13일 2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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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수업이 끝났다. 한 친구가 툭 던지듯 말했다. ‘뉴스 봤니?’ ‘응.’ 그러고는 대화가 끊어졌다. 나는 강의실을 빠져나와 기숙사로 향했다. 벌써 네 번째다. 1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자살했다.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마음을 잡을 때쯤 또 사건이 터졌다. 지난달 20일, 중간고사 직전이었다. 그 뒤에도 이어진 두 건의 자살. 우린 말을 잃었고 서로에게조차 마음을 숨기기 시작했다.”

올 들어 자살한 4명의 KAIST 학생들과 모두 알고 지내던 한 KAIST 학부생의 고백이다. 그들의 상실감이 어떨지 짐작된다.

자랑의 원천이어야 할 장학금이

KAIST 학생들에겐 ‘장짤’이라는 은어가 있다. ‘장학금 짤렸다’는 뜻. 장학금을 전혀 못 받을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장학금을 받지만 전액장학금이 아니어서 한 푼이라도 등록금을 내게 되면 그렇게 말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장짤’은 돈이 아니라 자존심 문제”라고 말한다. 성적에 대한 중압감을 가늠케 한다. 전공과목이 아닌 일본어, 철학 등까지 100% 영어로 수업하겠다는 것도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

그렇지만 KAIST에 입학만 하면 낙제를 하든, 몇 학기를 다니든 국민 세금으로 전액장학금을 주던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부족하지 않게 장학금을 주되 ‘성과에 포상하는’ 원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장짤’이 되면 모멸감을 느끼는 구조가 아니라, 장학금을 받는 것이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 시스템 말이다.

기자는 이 대목에서 MBC ‘나는 가수다’ 1회의 실패를 떠올린다. 탈락자를 발표하되 유머러스한 진행으로 경쟁 분위기를 완화하고 다른 참가 가수들이 그를 격려하는 이벤트를 준비했다면, 그래서 누가 떨어지든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절차를 디자인했다면, 가수 김건모의 탈락 앞에 제작진과 출연진이 그리 당황하지는 않았으리라. 7등을 탈락시키기보다 1등을 명예롭게 은퇴시키고 나머지는 계속 경쟁하는 구도였다면 어땠을까.

더 큰 문제는 차등장학금이 자칫 창의성을 억압하는 엉뚱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학교에선 초끈우주론이나 뇌(腦)과학에 탐닉해, 혹은 인문학과의 통섭에 푹 빠져 한두 학기 학점을 망쳐 놓는 학생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천재적 학자가 배양되는 경로의 하나다. 그들을 좌절케 하고 싹을 자르면 안 된다.

대학은 학문뿐 아니라 격려와 사랑이 전수되는 곳이어야 한다. 경쟁과 함께 협력을 체험해야 하는 곳이다. 나태는 꾸짖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은 칭찬받아야 한다. 아직 어리지만 지식은 물론 자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 삶의 무게를 감당하는 법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런 다층적 복합적 역할이 비단 KAIST만의 과제는 아닐 것이다. 사건 이후 교수들 사이에서 “앞으로 연구 실적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강의와 학생지도도 중시하겠다”는 반성이 나오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삶의 무게 견디는 법 배워야

무엇보다 이번 사건에 대한 논의가 이성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매우 안타까운 얘기지만 KAIST 학생들의 자살률이 다른 대학교나 또래들에 비해 특별히 높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KAIST의 학업 부담도 국내 대학 중에서는 무겁지만 외국 유명 대학에 비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KAIST는 그동안 숱한 개혁을 이뤄냈다. 덕분에 이 학교는 영국의 QS대학평가 2010년 발표에서 공학 분야 세계 21위의 성적을 거뒀다. 사건 후 KAIST 안팎에서 논의되고 있는 해법이 이 같은 개혁 물살을 되돌리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가장 나쁜 시나리오는 이 문제가 이념 대결로 비화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편 가르기 식 흑백공방의 늪에 빠질 뿐 진지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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