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현모]검찰, ‘암행어사 박문수’에게 배울 점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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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개봉된 영화 ‘적인걸’을 보면 당나라의 여제(女帝) 측천무후에게 거침없이 직언하고 조언하는 재상 적인걸(狄仁傑)의 모습이 나온다. 적인걸은 대규모 불상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연쇄살인사건을 예리하게 밝혀내면서 여제에게 대불(大佛)과 같은 상징조작보다는 힘없는 백성의 고통을 먼저 헤아리고 적절한 시기에 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간언(諫言)한다. 이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측천무후는 재위 15년에 태자(중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율곡 이이가 ‘동호문답’에서 적인걸을 ‘정치를 돌이켜 바른 길로 이끈(反正)’ 충신으로 평가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선왕조에서 적인걸이 자주 언급된 때는 중종시대였다. 중종은 자기와 같은 이름이 나와서인지 아니면 적인걸과 같은 충신을 기대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대규모 불상 건립 중단을 요구한 적인걸의 상소를 언급하면서 이단 혁파를 주장했다. 조광조 역시 적인걸이 이씨(李氏)의 당 왕조를 회복한 ‘반정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나는 영화를 보면서 암행어사 박문수를 떠올렸다. 천재적인 수사관이라는 유사성 때문만이 아니라 권력과 검찰이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표본이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영조의 신하였던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더 유명하다. 관찬기록인 ‘영조실록’에서 박문수는 국왕 영조와 논쟁하거나 논리적 설득으로 왕의 결정을 좋은 쪽으로 이끌어가는 유능한 재상이다. 이에 비해 구전설화집인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서민의 고통을 귀담아듣고 해결해 주는 조선 최고의 암행어사다. 백성의 억울함과 부조리한 현실을 극적으로 타개하는 구세주와 같은 역할이다.

부조리 타개로 백성 신뢰얻어

흥미로운 점은 ‘구비문학대계’에 어사 박문수 설화가 210여 개 수록되어 있는데 전국 어디든 가지 않은 곳이 없는 ‘팔도어사’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가 실제로 어사로 파견된 것은 딱 두 번뿐이다. 영조 재위 3년째인 1727년 9월과 재위 7년째인 1731년 12월에 각각 경상도와 충청도로 파견됐다. 박문수는 어떻게 대표적인 암행어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첫째, 기득세력의 대변자가 아니면서도 국왕의 절대 신뢰를 받는다는 박문수의 이미지다. 박문수는 당시의 지배세력인 노론이 아닌 소론 출신으로 ‘이인좌 난’ 때 활약함으로써 왕의 절대적 신뢰를 받았다. 그는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반군 지휘자 정희량 편에 섰던 많은 영남민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했다. 그의 말을 듣고 산에서 내려온 대다수 사람은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후부터 사람들 사이에 박문수는 믿을 만하다는 신뢰가 형성되었다.

둘째, 그는 토호세력의 발호를 힘이 아닌 슬기로 이겨내는 지혜로운 관리였다. 박문수 설화에서 그가 가장 많이 출두하는 지역은 무주 구천동이다. 중앙권력이 미치지 않는 첩첩산중으로 구씨와 천씨로 대표되는 지방 토호의 발호가 심각한 곳으로 간주되었다. 오로지 암행어사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반도의 오지인 무주 구천동에서 어사 박문수는 중앙의 최고 권력자도 어찌하지 못하는 유력 집단을 꾀로 제압해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었다. 그런데 박문수가 오지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지방 수령도, 양반도 아니었다. 아이들의 재판놀이를 보면서, 여염집 부녀들의 꾸중을 들으면서 그는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곤 했다. 문제도 지역에 있고 해법도 그곳에 있음을 박문수 설화는 숱한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셋째, 가장 중요한 점은 최고 권력자의 잘못을 직간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 정치적 독립성이다. 실록은 그를 ‘어전에서 간혹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실제로 박문수는 왕 앞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신하였다.

영조가 재위 20년째 되는 해에 편당(偏黨)하는 무신(武臣)의 머리를 모조리 베어 궐문에 매달겠다며 노발대발했을 때가 그 예다. 박문수는 왕 앞에 나아가 면류관(冕旒冠)의 경계, 즉 왕이 쓰는 면류관 앞에 늘어뜨린 9개의 유(旒)와 귀 옆의 광과 진이라는 덮개는 그냥 장식품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즉, 왕은 작은 일까지 너무 자세히 보거나 세세한 일을 듣고 개입하여 일의 대체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간언한 것이다. 놀랍게도 영조는 안색을 고치면서 “경의 이 말은 참으로 나의 약석(藥石)”이라면서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과연 권력 앞에 자유로웠는지…

대한민국 검찰은 요즘 국회의원의 불법로비 의혹 수사와 같은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그리 얻지 못하는 듯하다. 원인은 여러 곳에 있겠지만 무엇보다 적인걸과 박문수가 발휘했던 신뢰받는 수사관의 조건, 즉 백성으로부터 신뢰받게 행동해 왔는지, 유력 집단의 압력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그리고 최고 권력자로부터 독립적인지를 돌이켜 보면 그 해법이 나오지 않을까.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는 따뜻한’ 거듭난 검찰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박현모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리더십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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